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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8/04/07 [특별기획]서역기행의 시작 9일 체험 후기
작성자 남*찬
작성일 2018.04.24

2018년 4월 7일 ~ 4월 15일,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길이자 위대한 역사를 따라가는 첫 관문, 정통 실크로드 서역기행의 시작 9일 상품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중국의 찬란했던 역사를 가득 품고 있는 서안에서 실크로드의 첫 관문인 천수의 맥적산 석굴

 거쳐, 황하석림과 병령사 석굴을 탐방하고 만리장성 서쪽 끝자락 가욕관 성루를 둘러봅니다.

어 돈황에서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막고굴을 방문하여 불교문화가 꽃 피웠

던 역사 속 현장을 만나고 명사산과 쿠무다크 사막에서 온몸으로 사막을 느껴봅니다. 

<서유기>의 무대가 되었던 투루판과 천산천지 방문 후, 진시황의 병마용에서 마무리하는 여정 

입니다. 

 

[1일차] 
 
 
인천-우루무치 구간 약 5시간 40분이 소요되는 짧지 않은 거리의 비행이 끝나고 늦은 시각 공항을 나와 바로 호텔로 이동했습니다. 공항에서 호텔까지는 약 15분 거리. 다음 날 있을 일정에 대비하여 가까운 호텔로 수배하였고, 오늘부터 혜초 실드로드 1편 서역기행이 시작합니다. 
 
[2일차] 
 
 
2일차 아침이 밝았습니다. 첫 일정 천산천지를 보러가기 위해 호텔에서부터 약 1시간 30분을 달려 매표소에 도착했습니다. 
 
 
 
매표소 안에 들어와 표를 끊고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 대기 중입니다. 사람이 많이 없을 시기에 방문하여 여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탄 셔틀버스가 매표소와 천산천지 중간에 있는 소수민족 마을에 정차했습니다. 이 소수민족 마을에서 모두 내려 의무적으로 마을을 한 바퀴 돌며 구경해야 합니다.  
 
 
 
소수민족이 사는 공동체 마을인데, 길거리에 먹거리와 장식품을 파는 상점이 늘어서 있습니다. 천지 주변에는 카자흐스탄 민족인 카자흐족 유목민들이 목축을 하면서 살고 있으며, 일부는 천지 주변에서 장사를 하거나 민속의상을 입고 관광객에게 돈을 받고 함께 사진을 찍어주기도 한답니다. 
 
 
소수민족인 카자흐족 마을을 여유롭게 돌아보고 다시 셔틀버스에 탑승했습니다. 
 
 
 
셔틀버스 종점역에 내려 다시 전동카를 타고 천산천지까지 쭉 들어갑니다. 
 
 
전동카에서 내리면 탁 트인 풍경의 설산과 그 아래 드넓은 천지가 보입니다. 이 곳이 바로 천산천지입니다. 천산천지는 해발고도 5,445m 보그다산 박격달봉 중턱 1,980m 지점에 위치했으며, 가로 3.5km, 세로 1.5km, 최고 수심 105m인 산정호수입니다. 천산천지는 만년설이 녹아 물이 고인 빙적호로, 중국인들은 천지일대를 중국의 스위스라고 부릅니다. 
 
 
 
 
아직 시기가 일러 천산천지가 얼어 있었습니다. 천산천지를 바라보며 녹아 있었다면 유람선을 타고 한 바퀴 돌아볼 수 있었을텐데 라는 아쉬움이 가슴 한 켠에 남았습니다. 
 
 
전망대에는 몇몇 중국 단체 관광객들이 있었습니다. 
 
 
전망대는 한 군데가 아닌, 몇 군데 간간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전동카가 내려준 곳에서 도보로 더 들어가야 합니다. 
 
 
 
 
한라산과 백두산 천지도 아름답게 보고 온 경험이 있으나, 천산천지 또한 장관을 연출하며 설산을 볼 수 있다는 색다른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깊숙이 들어와 전망대에서 머물며 천산천지의 아름다운 절경을 가슴에 품고 다시 전동카 정차 지점으로 돌아갔습니다. 
 
 
 
전동카를 기다리면서 천산천지 풍경구를 내려다 봤는데, 극성수기 시즌에 수많은 사람들로 붐빌 생각을 하니 아찔했습니다.  
 
 
전동카를 타고 다시 셔틀버스 종점역으로 돌아와, 
 
 
셔틀버스를 타고 다시 매표소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전용차량에 몸을 싣고 다음 날 있을 투루판 일정에 대비하여 투루판으로 이동했습니다. 
 
[3일차] 
 
 
아침 일찍 투루판에 있는 카레즈 운하 박물관으로 이동했습니다.  
 
 
 
 
 
 
박물관에는 대형 카레즈 모형과 카레즈 굴설과정, 카레즈 공정에 사용된 공구와 유물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천산산맥 만년설이 녹아 지하로 스며들어 화염산 밑으로 흐릅니다. 화염산 지하에서 물길을 찾아, 20-30m 간격으로 수직 우물을 파서 각각의 우물 바닥과 같은 높이의 수로를 뚫어 우물과 우물을 연결합니다. 지하수로는 5-6km에서 길게는 수십km로, 약 1,000여개의 카레즈가 만들어져 투루판에 물을 공급합니다. 총 길이는 약 5,000km이며, 2000년전 한나라 때 처음으로 만들어진 카레즈는 중국 만리장성, 경성대운하(길이 약 3,200km)와 함께 중국 3대 공사 중 하나로 꼽히는 수리 시설입니다. 
 
 
 
 
 
3-5명이 한 팀을 이루어 한 갈래를 파는데 수개월에서 수년까지 걸린다고 합니다. 수맥을 찾은 후 추를 이용하여 수직으로 우물을 팝니다. 우물이 20-30m 간격으로 있으며, 지하수로를 파는 인부들의 숨구멍이 되고 완공 후에는 우물이 됩니다. 
 
 
박물관 주변으로 포도밭이 형성되어 있는데, 투루판의 연평균 강수량은 16.6mm, 증발량은 3,000mm, 최고 기온은 47.5도로 세계에서 3번째로 더운 도시입니다. 이러한 기후 조건으로 이 곳에서 재배되는 포도의 당도는 20-40%로 세계 최고라고 합니다. 재배되는 포도의 종류가 100여종이나 되고 연간 생산량은 6,000톤이 넘는다고 합니다. 
 
 
 
카레즈 운하를 보고 다음 일정으로 고창고성에 도착했습니다. 
 
 
고창고성의 둘레와 면적은 드넓습니다. 걸어서 구경하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에 전동카를 타고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고창고성은 짚을 썰어 진흙과 반죽하여 만든 흙벽돌로 축적된 성으로, 외성, 내성, 궁성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1500년이 지난 지금 성이 이 정도 남아있는 것은, 비가 적은 건조한 지역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성을 둘러보기 편하게 도로와 데크길로 잘 꾸며놨습니다. 
 
 
건물의 중심에 사각형의 불탑이 복원되어 있습니다. 
 
 
 
 
627년 현장 법사가 고창국와 국문태의 초청으로 한달 동안 법회를 가진 장소입니다. 
 
 
 
 
 
 
자유 시간이 있어 옛 왕국을 한 바퀴 둘러봤습니다. 
 
 
 
 
 
옛 성터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시 거리에 한계가 있을 정도로 너무나 거대하고 드넓었습니다. 
 
 
 
 
 
 
폐허가 된 성터를 여유롭게 둘러보고 다시 전동카를 타고 입구로 나왔습니다. 
 
 
고창고성을 둘러보고 약 3-8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고대 고창국과 당나라 귀족들의 공동 묘지 아스타나 고분군으로 이동했습니다. 
 
 
 
 
고분군은 운동장만한 구획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한 구획당 20-30개의 봉분이 있었으며, 봉분의 수가 수백개에 달했다고 합니다. 아직도 땅 속에는 발굴되지 않은 수천개의 묘지가 매장되어 있습니다. 그 중 공개된 묘는 210, 215, 216호입니다. 묘마다 미이라 또는 벽화가 있습니다. 
  
 
아스타나 고분군을 가볍게 둘러보고, 화염산을 바라보며 투루판에서 현존하는 제일 큰 불교석굴 사원 베제크리크 천불동으로 향했습니다. 
 
 
 
 
 
위구르어로 '아름답게 장식한 집'이라는 뜻을 가진 베제크리크 천불동은 중국 불교 문화의 귀중한 보물로, 1982년 2월 중국 국무원에 의해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습니다. 
 
 
 
 
 
 
석굴은 6-13세기에 걸쳐 만들어 졌는데, 여러 언어로 쓰인 불경 사본과 천불도는 불교 문화의 중요한 자료입니다. 하지만 1904년-1913년, 천불동 벽화의 90%가 러시아, 독일, 영국, 일본 등 4개의 탐험대에 의해 뜯겨지고, 석굴 벽화와 불상을 집중적으로 약탈해 갔습니다. 뜯겨진 벽화는 국외로 반출되어 각 나라의 유명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위구르족 할아버지가 소수민족 전통 악기를 튕기며, 적막한 베제크리크 천불동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고 계셨습니다. 
 
 
베제크리크 천불동에서 화염산 산맥으로 이어지는 길의 경치가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베제크리크 천불동 관광을 마치고 선선으로 이동하여 쿠무다크 사막에 도착했습니다. 
 
 
 
 
 
쿠무다크 사막은 매표소에서도 약 5-10분 정도 도보로 더 들어가야 나옵니다. 
 
 
선선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사막과 도시가 이어져 있는 사막 속의 오아시스 도시입니다. 반대로 쿠무다크 사막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도시와 연결된 사막이라고 합니다. 
  
 
쿠무다크 사막 입구에서 사막 지프차를 타고 약 7분 정도 이동합니다. 사막 지프차에서 내리면 쿠무다크 사막 정상에 도착하게 됩니다. 
 
 
 
 
 
쿠무다크 사막의 모래는 밀가루처럼 입자가 섬세하고 곱습니다. 뜨거운 모래 속으로 발도 넣어보고, 모래길을 걷기도 하고, 산 아래로 보이는 선선 시내도 구경했습니다. 
  
 
 
 
끝도 보이지 않는 이 드넓은 사막 언덕을 사막 지프차로 스릴감있게 오르고 내렸습니다. 마치 놀이공원에서 놀이기구를 타는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쿠무다크 사막 정상에서 자유 시간을 갖고 다시 사막 지프차로 내려와 매표소까지 도보로 이동했습니다.  

 

 
저녁을 든든하게 먹고 선선 열차역으로 이동했습니다. 열차역 대합실에서 간단한 세면과 옷을 갈아 입고 열차 탈 준비를 했습니다. 
 
 
21:10 야간 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야간 열차 4인 1실 침대칸에 숙박하며, 한국에서는 느껴보지 못할 순간을 경험했습니다. 1-2층 침대로 되어 있으며, 캐리어를 위에 올릴 수 있도록 나름 수납 공간이 잘 되어 있습니다.   
 
[4일차] 
 
 
04:19 유원역에 도착했습니다. 새벽이라 그런지 기온이 차가웠습니다. 중국에서는 00:00-05:00 까지 고속도로를 올라갈 수가 없기 때문에 차 안에서 05:00 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우리가 묵을 호텔에 미리 도착하여 아침 식사와 간단한 세면을 하고 명사산으로 이동했습니다. 호텔에서 명사산까지는 전용 차량으로 약 10분 걸렸습니다. 
 
 
 
명사산 매표소에서 표를 구매하고 줄을 서서 입장했습니다. 선선과 마찬가지로 돈황 역시 도시와 사막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는 풍경이 너무나 특이하고 놀라웠습니다. 
 
 
 
 
명사산의 모래 역시 미세하고 고운 입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발 덮개를 빌려 착용했습니다. 명사산은 높이 약 1,650m, 남북 약 20km, 동서 약 40km에 이르는 거대한 모래산으로, 언덕의 모래가 날리는 소리가 마치 사람의 흐느끼는 소리 같다고 해서 명사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명사산 입구에서 낙타를 타고 한 바퀴 둘러보는 낙타 체험 일정이 있습니다. 
 
 
 
 
5마리 낙타가 한조가 되어 움직입니다. 
  
 
 
 
쌍봉 낙타를 타는데 사막 모래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낙타를 타고 명사산 정상 부근을 한 바퀴 돌아옵니다. 
  
 
 
 
 
예전에는 정상에서 썰매를 타고 내려왔다는데, 요즘은 위험해서 썰매 타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낙타를 오랫동안 타고 명사산을 돌아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데크길을 따라 월아천으로 이동했습니다. 
 
 
 
 
걷다 보니 저 멀리 초승달 모양의 작은 오아시스 월아천이 보였습니다. '월아'는 중국어로 초승달을 뜻하는데, 월아천은 경치가 아름다워서 한나라 때부터 돈황 8경 중 하나로 꼽혔다고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돈황이 갑자기 황량한 사막으로 변하자, 하늘의 선녀가 슬퍼서 흘린 눈물이 떨어져 지금의 월아천이 되었다고 합니다. 월아천의 발원지는 돈황 남쪽에 솟아 있는 곤륜산맥의 눈 녹은 물이 만든 당하라는 이릉의 강으로, 이 물이 지하로 흘러 비교적 저지대인 이 곳에서 솟아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월아천 옆에 있는 이 건물은 당나라와 송나라 때 번성했던 도교의 사원으로, 청나라 때 복원된 것을 1960년대 문화혁명을 거치며 홍위병에 의해 파괴된 것을 1986년 재건축하였다고 합니다. 
  
 
 
 
 
사원이 명사산의 황량한 사막 한 가운데 있어 묘한 느낌을 주면서도 사원 안에 있는 이쁜 꽃과 그 꽃이 풍기는 향기 때문에 발길을 쉬이 옮기기 어려웠습니다. 
 
 
 
 
 
사원 내부는 기념품점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막 관광지라 그런지 모래로 만든 기념품들이 많았습니다. 
  
 
 
 
 
꽃이 피기 시작하는 것을 보니 돈황에도 봄이 성큼 다가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황량한 사막 위에 피어나는 이쁜 색감의 꽃이라 그런지 더욱 향기로웠습니다. 사찰을 둘러보고 들어오던 길을 그대로 돌아나왔습니다. 
 
 
 
 
명사산과 월아천을 모두 구경한 후 신발 덮개를 벗어 곳곳에 있는 반납함에 반납하고 전동카를 타고 입구로 나왔습니다. 
 
 
다음 장소로, 중국 3대 석굴의 하나이자 돈황 불교 예술의 결정체 막고굴에 도착했습니다. 
  
 
 
하루에 막고굴을 관람할 수 있는 인원을 제한하기 때문에 극성수기 시즌에는 표를 구매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매표소 안에는 기념품점이 있습니다. 
  
 
 
 
막고굴을 관람하기 전 막고굴디지털전시센터에서 다큐멘터리식 영상 자료를 미리 보여주는데 수신기를 나눠주고 한국어로도 들을 수 있어 관광객들을 얼마나 배려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영상은 30분마다 상영 시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영상을 관람한 후 셔틀버스를 타고 막고굴로 이동하게 됩니다. 
 
 
 
 
 
366년부터 석벽을 파서 굴을 만들기 시작한 이 곳은 14세기까지 수많은 승려와 조각가, 화가, 역경사, 석공, 도공, 목공, 시주들이 드나들면서 하나 둘씩 굴을 파 만들었습니다. 
약 10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렇게 만들어진 크고 작은 굴은 무려 735개가 있으며, 약 1,000개의 굴이 있다하여 천불동이라고도 불립니다. 각 굴마다 불상의 형태나 벽화의 내용이 다릅니다. 하지만 어두운 동굴의 천장과 벽화를 가득 메우고 있는 그림에는 한결같이 불교 특유의 종교적 고행이 느껴지며 각 굴의 천장화는 매우 정밀하고 기하학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막고굴하면 빠질 수 없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왕원록이라는 사람입니다. 1900년에 왕원록이 16번굴을 청소하다가 옆 쪽 벽에서 텅 빈 소리가 들려와 막혀 있던 벽실을 허무니 바로 17번 장경동 굴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곳에서 5호16국 시대부터 북송 시기까지의 유물들이 다량으로 발견됩니다. 그 중 우리가 잘 아는 신라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도 이 곳에서 발견되는데, 이 유물들을 왕원록은 영국인 스타인에게 헐값에 판매하였고 스타인은 이 유물들을 대영박물관으로 가져가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각 나라에서 돈황의 막고굴 유물들을 헐값에 사가기도 했습니다. 
 
 
 
 
막고굴에 있는 모든 석굴의 내부는 사진 촬영이 전면 금지되어 있습니다. 현지에서 막고굴에 대한 관리를 철저히 하고 있습니다.
 
 
 
막고굴을 찾는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곳은 제 96굴인 이 북대불입니다. 이름 그대로 북쪽에 있는 큰 불상입니다. 그 위에 진흙을 입혀 모양을 완성하고 채색한 미륵불 좌상인데, 높이가 35.5m로 고개를 완전히 뒤로 젖혀야만 불상의 머리를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9층의 누각으로, 멀리서도 볼 수가 있어 막고굴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366년에 낙준이라는 승려가 수행길에 오르면서 돈황 명사산에 도착을 했는데 석양이 맞은편 삼위산을 비추자 산봉우리가 금빛으로 빛나는 것을 보고 부처님의 계시라고 느낀 후에 이 곳 막고굴에 처음으로 석굴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시대를 거쳐 지금까지도 이러한 유적과 벽화, 돈황문권(변문, 민간사), 불교 예술 등이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막고굴에 들어가면 현지 해설사가 별도로 나와 막고굴에 대한 자세한 안내와 설명을 해줍니다. 서툴지만 한국어로 또박또박 설명해 주기 때문에 과거 막고굴의 현장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막고굴을 한 바퀴 둘러보고 화창한 날씨 속에서 다시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 셔틀버스 정류장으로 향했습니다.
 
 
막고굴 관람을 마치고 오늘의 마지막 일정, 사주야시장을 구경하기 위해 야시장에 왔습니다. 약 1시간여의 자유시간을 가지게 되는데, 제가 느끼기에 사주야시장에서 1시간만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볼거리와 먹거리들이 다양했습니다. 
 
 
 
 
실크로드의 시작점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 돈황, 과거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는 사람들과 넘은 사람들로 붐비었을 사주야시장에는 유리공예품, 나무공예품, 장신구 등을 팔고 있습니다.
 
 
 
 
약 18만여명에 달하는 돈황의 주민 대부분은 한족이고, 회족과 티베트족, 그리고 위구르족 등 10개 소수민죽은 단 1%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실크로드의 교차점에 있는 사주야시장에는 이슬람교도들이 즐겨먹는 양꼬치를 많이 팔고 있습니다.  
 
[5일차] 
 
 
 
오늘은 장거리 여행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만리장성 서쪽 끝자락에 있는 가욕관을 관람하는 날, 돈황에서 가욕관까지는 전용 차량을 약 5시간 30분이 걸립니다. 중간에 있는 식당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가욕관에 도착했습니다.
 
 
 
 
가욕관은 예전 실크로드에서 지나야 하는 관문으로 만리장성의 시발점이 됩니다. 만리장성 보존 상태가 양호한 곳 중 하나입니다.
 
 
 
가욕관 안을 둘러보기 위해서는 매표소부터 입구까지 도보로 조금 걸어가야 합니다.
 
 
 
 
 
 
가욕관 성루 입구에 다다랐습니다.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발해만에 면한 산해관(천하제일관)이라면 가욕관(천하웅관)은 감숙성 가욕관시에 있는 만리장성 서쪽 끝에 위치하는 관문입니다. 예로부터 교통과 군사 요충지로 중시되었는데, 관문은 명나라 홍무 5년(1372년)부터 지어지기 시작하여 천산산맥과 기련산맥이 만나는 험준한 지세 위에 세워진 웅장한 건축물의 모습으로 '천하제일웅관'으로 칭해지고 있습니다.
 
 
 
 
 
 
성은 전체적으로 토벽으로 이루어진 내성과 벽돌을 쌓아 만든 외성의 이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군사방위체계를 따른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주변 둘레는 640m, 면적은 25,000평방미터, 높이는 10.7m이며 동쪽의 문은 '광화문'으로 상서로운 기운이 동쪽에서 일어나 광휘가 두루 비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서쪽 문은 '유원문'으로 회유로써 서쪽의 변방까지 안정시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동서 6,000km에 이르는 장성 중에서 가욕관, 산해관, 거용관이 3대 관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그 웅대함은 가욕관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광활한 사막의 한복판에 홀연히 나타나는 웅대, 경고한 가욕관에 누구라도 틀림없이 감동할 것입니다.
 
 
 
 
 
 
성 안에는 연무장뿐 아니라 옛날 이곳의 생활 모습을 복원해 놓은 전시관인 '유격장군부', 관우를 모신 '관제묘' 등 제각각 이름을 가진 여러 건물들이 있습니다.
 
 
 
 
 
만리정성이 다시 중국인들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14세기 이후 명나라 때입니다. 명나라는 이민족인 몽골족을 북방으로 밀어냈지만 과거 한나라나 당나라 때처럼 완전히 복속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즉 북방 유목민, 남방 농경민이라는 전통적 구도가 복원되면서 장성을 강화해 방어력을 키우자는 기존의 사고가 되살아난 것입니다. 명나라는 한나라 때 하서4군 가운데 하나였던 돈황 같은 오아시스 도시는 포기하고 농경이 가능한 지역을 자국의 영역으로 여겨 가욕관을 서쪽 끝에 재구축했습니다.
 
 
 
 
 
중국사에서 군사용으로서의 만리장성의 기능은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면서 끝이 났습니다. 북방민족인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면서부터 만리장성은 중앙아시아나 몽골 정복에 걸림돌이 되는 애물단지였습니다. 사막 한가운데 순전히 군사용으로 축조된 성채인 가욕관은 그 효용이 떨어지자 군인들과 그 가족들이 떠나자 도시는 순식간에 황폐해졌습니다. 성곽이 재발견된 것은 19세기 초 고대유적으로서입니다.
 
 
 
 
 
 
이 문이 바로 서성문이라고도 불리는 가욕관의 정문인 '가욕관문'입니다. 가욕관문으로 들어가면, 본격적으로 거칠 것 없는 황무지가 펼쳐집니다.
가욕관은 군사방어용으로 지은 까닭에 설계가 매우 치밀할 뿐 아니라 건축 공사도 매우 엄격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성벽은 대부분 흙을 다져 만들었지만 서쪽에는 벽돌을 사용해 웅장하고 튼튼합니다. 옛날 기록에 의하면 가욕관의 설계자에게 어느 정도의 벽돌이 필요한가를 물어, 만약을 위해 1개의 벽돌을 여분으로 준비했는데, 가욕관의 완성 시에는 정확하게 1개의 벽돌이 남았다고 합니다. 진위 확인은 불가능하나 가욕관이 얼마나 치밀한 계획에 의해 지어졌는지를 나타내는 일화가 됩니다.
 
 
 
 
 
수백년의 풍파 속에서도 여전히 견고하고 튼튼한 모습을 자랑하는 것이 높은 건축 수준 덕분이 아닌가 합니다.
 
 
 
 
가욕관을 여유롭게 둘러보고 근처에 있는 장성 박물관으로 걸어서 이동했습니다.
 
 
 
 
가욕관 초입까지 다시 되돌아와,
 
 
 
옆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보니 장성 박물관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1988년 말, 가욕관시 신화남로에 세워진 장성 박물관은 만리장성에 관련된 것들만 전문적으로 다룬 박물관으로는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입니다.
 
 
 
 
가욕관을 전시 내용은 크게 '춘추전국 장성', '진/한 장성', '북위/수/당/요/금 장성', '명 장성' 4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위대한 장성'을 주제로 하여 전국시대부터 명대까지 3000년간의 장성 건축사를 모형, 도표, 사진 등의 형식으로 1100여평의 전시실에 농축해 놓음으로써 장성 연구자들에게는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가욕관 일정을 모두 마치고 야간 열차를 타기 위해 가욕관 역에 도착했습니다.
 
 
가욕관역 대합실에는 열차를 기다리는 현지인들로 북적이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열차는 22:30에 도착하며, 전에 탔던 4인1실 침대칸에 숙박하게 됩니다.
 
 
선선역에서 탔던 야간 열차와 구조는 똑같습니다. 야간 열차에는 세면대와 화장실이 잘 구비되어 있습니다.
 
[6일차]
 
 
07:11 난주역에 도착했습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아침 식사로 난주의 우육면을 먹기 위해 캐리어를 이끌고 식당으로 이동했습니다. 난주에 도착하니 약속이라도 한 듯 하늘에서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난주 우육면을 먹고 병령사 석굴을 보러 가기 위해 유가협 댐으로 이동했습니다. 이동하는 중에 비가 더 거세져 도착했을 때는 우산을 꺼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유가협 댐에서 보트를 타고 병풍처럼 펼쳐진 황하석림을 바라보며 약 1시간 동안 더 들어가야 병령사 석굴을 볼 수 있습니다.

 

 
 
유가협 댐에서 색다르면서도 푸르른 황하 물결 위에서 쾌속선을 약 50분 정도 타고 병령사 계곡에 들어서면 붉은색 바위들이 솟아 있고, 붉은색 황하의 물살이 급히 흘러갑니다.
 
 
 
 
쾌속선에서 내려 병령사 석굴 입구로 이동했습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라 그런지 관광팀은 우리 밖에 없었습니다.
 
 
매표소에서 표를 구매하여 병령사 석굴로 입장했습니다. 현지 해설사가 나와 설명을 해주면 가이드가 통역을 해주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불교 예술의 절정인 병령사 석굴은 황하의 상류인 적석협곡의 동쪽 기슭을 따라 마른 황토흙과 풀 한포기 없는 바위로 된 수직으로 선 절벽에 60cm 높이로 약 2km에 걸쳐 늘어서 있습니다.
 
 
 
 
 
 
총 183개 석굴에 694개의 석상과 82개의 소상이 있는데, 서진시대부터 조성되기 시작하여 명나라 때까지 계속 이어졌으며, 특히 2/3에 달하는 석굴과 불감은 당나라 시대에 제작되었습니다. '병령'은 티벳어를 음역한 것으로 '10만개의 불상'을 뜻한다고 합니다. 즉 불상이 매우 많다는 의미로 높이 60m의 절벽을 따라 크고 작은 석굴이 200m 가량 이어집니다.
 
 
 
 
 
 
 
옛 시대에 만들어진 불상과 아름다운 벽화의 채색이 변색되지 않은 걸 보니 마치 과거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과거 불교에 대한 불심이 얼마나 경이로웠는지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당나라 전성기에 조성된 불상들은 이처럼 특별히 보호하는 듯 했습니다.
 
제11굴 십일면관음보살입상입니다. 굴은 당대에 만들어졌지만 입상은 명대의 것이라고 합니다.
 
 
 
 
 
석굴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어 잘 관리되고 있습니다. 이 깊고 깊은 산 바위 전면에 구석구석 바위를 파고 부처상을 새기는 그 마음을 헤아리기란 너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같은 인간으로서 경외심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순간입니다.
 
 
유가협 병령사 석굴에서 가장 유명한 불상입니다. 좌불상으로 상반신은 돌로 조각하고 하반신은 진흙으로 빚은 소조로 높이 27m의 당나라 때 작품입니다.

 

 
 
 
 
병령사 석굴 맞은 편에 사찰이 하나 있었는데, 이 안에는 부처의 와불상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병령사 석굴은 천수의 맥적산 석굴, 돈황의 막고굴 등과 함께 중요한 문화유산입니다.
 
 
 
 
 
 
 
 
병령사 석굴을 모두 돌아보고 왔던 길을 따라 다시 선착장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선착장 식당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다시 쾌속선에 올라탔습니다. 약 50분간 달려 주차장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난주에 도착하고나서부터는 날씨가 흐리고 비는 계속 내렸습니다.
 
[7일차]
 
 
 
천수로 이동하여 세계문화유산이자 국가 5A급 풍경구로 지정된 맥적산 석굴에 도착했습니다. 천수는 중국 정권이 수립된 이후 화력발전소 및 공장이 설립되고 광산이 개발되어 근대 공업도시로 변화했지만, 본래 위나라와 당나라 시기 불교의 중심지로 유명했던 곳입니다.
 
 
입구에서 전동카를 타고 올라가야 합니다. 걸어서 올라갈 수도 있지만 걸어가면 시간이 적잖이 걸립니다.

 

 
 
 
 
맥적산 석굴은 맥적산 봉우리에 자리잡고 있어 전동카에서 내리고도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합니다. 올라가다 보면 저 멀리 맥적산 봉우리와 맥적산 석굴이 보입니다.
 
 
 
 
 
 
짧지 않은 거리를 걸어 드디어 맥적산 석굴 바로 아래까지 도착했습니다. 맥적산은 산 정상이 원형을 이루면서 하부보다 넓어 보리를 쌓아놓은 모양처럼 보인다고 하여 맥적산이라고 부른다 합니다. 맥적산 석굴에서도 현지 해설사가 따라 붙어 맥적산 석굴에 대해 자세한 안내와 설명을 해줍니다.
 
 
 
 
석굴은 아슬아슬한 각도의 높은 절벽에 만들어진 석굴이어서 아슬아슬한 난간에 의지해 계단을 올라야 합니다.
 
 
 
 
 
당나라 개원 22년(734년)에 발생한 큰 지진으로 인해 산굴 절벽면 중부가 파괴되었는데, 이후 이 중부를 기준으로 동쪽 절벽과 서쪽 절벽을 구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동쪽 절벽에는 54개, 서쪽 절벽에는 140개의 석굴이 있다고 합니다. 동쪽 절벽의 석굴 중 열반굴, 천불랑, 칠불각 등이 가장 아름답다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서쪽 절벽에는 만불당, 천당동, 제121굴, 제123굴, 제127굴, 제165굴 등 가장 가치 있다고 평가받는 동굴이 모여 있습니다.
 
 
삼존불은 두 번째로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 문제가 조성한 것으로, 높이가 15m에 달한다고 합니다.
 
 
 
 
천수시 대도독 리윈신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칠불각을 축조했다고 합니다. 그 후 수나라 문제 인수 5년(601년)에 칙령을 내려 맥적산에 신니 사리를 보관하는 탑을 건설하도록 했답니다. 이후 당, 오대, 송, 원, 명, 청대에 걸쳐 연이어 다양한 석굴과 소상, 부조, 벽화가 조성되어 현재의 맥적산 석굴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불교가 중국에 유입된 이후 빠른 발전을 이룬 남북조 시대에 집중적으로 조성된 유적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아쉽지만 보호를 위해 현재 석굴은 절반 정도만 공개하고 있습니다. 몇몇 석굴은 철망을 쳐 사람의 접근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충분히 깍아진 절벽에 조성된 맥적산 석굴은 매우 웅장했고 과거의 예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굴 10개 중 여섯 번째인 맥적산 석굴은 아찔한 벽 위에 새겨진 동양의 조각박물관이라 불리웁니다. 특히 정교한 진흙조각예술이 으뜸입니다.

 

 
 
 
 
흙으로 빚은 조각들이라고 하는데, 살아있는 듯한 현실감에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가파른 절벽에 새겨진 수많은 불교 조각과 벽화를 감명깊게 관람하고 다시 전동카를 타고 주차장으로 돌아와 천수 시내로 이동했습니다.
 
[8일차]
 
 
세계 8대 불가사의 손꼽히는 진시황 사후 능을 수호하는 지하 금위군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는 병마용을 보러 왔습니다. 매표소에는 수많은 관광객들로 북적였습니다. 나날이 갈 수록 병마용을 보러 오는 관광객들이 불어나고 있다고 했습니다. 서안 시내에서 이 병마용이 있는 임동현까지 지하철 공사를 하고 있어 조만간 서안 시내에서 병마용까지 지하철로 10분이면 올 수 있다고 합니다.
 
 
 
 
 
 
병마용갱을 보려면 매표소 입구에서 도보로 약 10-15분 정도 더 들어가야 하는데, 가까운 거리는 아닙니다.
 
 
 
 
1974년 3월 어느 날 아침, 산시성 린퉁현 시양촌의 농민들이 마을 남쪽에서 땅을 팠는데, 오랜 가뭄으로 땅이 메마르자, 마을 회의에서 관개용 우물을 파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대략 3m쯤 파내려 갔을 때 한 농민의 곡괭이 끝에 사람 몸통의 도용이 걸려 나왔습니다. 옛날부터 시양촌 일대에선 도용 조각이 발견됐었는데, 이번 것은 사람 몸통을 완벽히 갖춘 것이었습니다. 병마용이 세상 밖으로 드러난 순간이었습니다. 1976년 1호갱 전시관을 지으면서 발굴이 시작되었고, 문혁으로 대학들이 문을 닫아 전문 인력을 찾기 힘들었습니다. 따라서 전문가들의 지도 아래 학생 60명과 군인 100여명이 동원됐습니다.
1호갱은 1985년 2차 발굴을, 2009년부터 3차 발굴을 진행했습니다. 2차 발굴까지 1,000여개의 병사용, 18승의 전차용, 100필의 마용, 검과 창 등 각종 무기가 발견됐습니다.
 
 
 
 
 
 

 
 
병마용의 배치 구조는 고대 군대 편제와 같습니다. 1호갱은 좌군, 2호갱은 우군, 3호갱은 지휘부에 해당합니다. 2호갱은 길이 124m, 넓이 98m에 달하고 발굴은 아직 안되었습니다. 3호갱은 규모가 작아 발굴이 끝났습니다.
 
 
 
 
실제 병마용은 출전하는 병사의 모습을 잘 묘사했습니다. 늠름한 체격에 키는 175-195cm라고 합니다. 포즈와 얼굴 표정이 각기 다르고 군단은 선봉, 주력, 후위, 익위로 구성됐습니다. 선봉에는 갑옷을 입지 않은 경보병용이, 주력은 38대의 전차와 중보병이 엇갈려 배치됐습니다. 중보병은 갑옷을 입고 손에 창, 칼, 활 등의 병장기를 들었습니다. 보면 볼 수록 옛 진나라 시기에 어떠한 방법으로 이러한 병마용을 만들었는지 신기하고 놀라울 따름입니다. 감탄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병마용갱을 탐방하고 야간에는 서안 시내의 중심지에 있는 회족거리를 방문했습니다. 서안 종루를 구경하면서 회족거리로 이동했습니다.
 
 
 
 
 
 
 
실크로드의 시작점인 서안은 이슬람, 아프가니스탄인들이 많이 유입되는데, 이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해서 회족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현재 중국 55개 소수민족 중에서 회족이 두 번째로 많은데, 서안에서는 이들이 모인 회족거리가 유명합니다.
주말이라 그런지 어마어마한 인파로 회족거리를 줄서서 구경해야 했습니다. 회족거리에는 양꼬치를 비롯한 다양한 먹거리와 볼거리, 그리고 기념품점들이 거리 양쪽으로 늘어서 있습니다. 자유 시간 1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다양한 매력이 있는 곳입니다.
 
[9일차]
 
 
 
 
 
서역기행의 끝이 다가왔습니다. 마지막으로 방문하는 곳은 652년 당나라 고승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을 보관하기 위해 세워진 대안탑입니다. 대안탑은 중국 불교 역사상 중요한 곳이라고 합니다.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산스크리트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 및 보관을 한 장소로 알려진 곳이어서 많은 중국 불교도들이 방문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불교 승지인 대안탑은 서안시 남쪽 4km 지점의 자은사 경내에 있으며, 서안시의 상징적인 탑 중 하나입니다. 이 탑은 당나라의 황제 당 고종이 어려서 여읜 어머니 문덕황후를 기리기 위해 세운 탑이라고 합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 탑과 주변의 건물들은 수많은 전쟁과 역사 그리고 자연풍파를 지나오면서 많이 훼손이 되었는데, 그나마 대안탑만이 원형의 모습을 간직하고 지금껏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2018년 4월 7일 기대에 부풀어 떠났던 서역기행 혜초 실크로드 1편의 여행이 4월 15일, 짧지 않은 9일 동안의 다양한 경험과 추억을 새기며 모두 끝이 났습니다.
 
혜초 실크로드 시리즈는 1-8편까지 있습니다. 중국 서안에서 이스탄불까지 6,400km에 달하는 대장정으로, 이 대장정의 목적은 실크로드를 단순하게 횡단하는 것이 아니라 '문명의 교역로'에서 자신만들의 고유한 문화 위에 새롭게 받아들인 문명의 유산들과 거칠고 아름다운 대자연까지 만나는 것입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저희 혜초와 함께 실크로드 여행을 떠나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