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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7년 8월 8일 유럽 최고봉 엘브러즈(Elbrus, 5,642m) 등반 후기
작성자 김*주
작성일 2017.08.27


 

 

유럽 최고봉 엘브러즈(Elbrus, 5,642m) 등반 후기

 

일      정 : 2017년 8월 8일(화) ~ 8월 18일(금) 9박 11일
여행지역 : 인천-모스크바-민보디-테스콜-체켓봉-산장-퓨리엇산장-파트코브락-정상(5,642m)

              -산장-테스콜-민보디-모스크바-인천

 

 

 

1. 네 삶의 고도를 높여라


하루도 운동을 거르지 않는다. 그리고 같은 운동을 매일 반복하지 않는다. 걷고 달리고 매달리고 공원과 울창한 숲과 아슬한 능선을 오르내린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근육이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도 몸은 어느 새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몸은 기억한다. 훈련 기간이 길고 정상을 향해가는 여정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들수록 몸은 고통과 희열의 이중주를 더 잘 기억한다. 고산은 그곳이 어디든, 얼마나 높든, 내게는 최고의 고통과 환희의 이중주다.


아들과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다녀온 후 나는 계속 달렸다. 산 능선을 이어달리는 트레일 러닝을 하면서 나는 늘 설산과 고산의 능선을 상상했다. 설산과 고산에서만 마주할 수 있는 대자연의 파노라마와 저 아래 우리네 지난한 삶의 문제들에 대한 작은 깨달음. 그런 깨달음들이 내게 용기와 도전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지난 봄, 나는 내 삶의 고도를 높이겠다는 결심과 동시에 장기적으로 Imja Tse, Mera Peak 그리고 Ama Dablam 등반까지 꿈꾸며 유럽최고봉 러시아 Elbrus 등반을 위해 다시 혜초트레킹을 신청했다.

 

 

 

2. 고산을 걸으며 자기고행과 침잠의 시간을 보내다


2017년 8월 8일 오전. 침낭으로 부풀어진 카고백을 매고 나는 인천공항에 들어섰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앞에 혜초 카고백이 또 있다. 함께 울산에서 올라온 동갑내기 김용락씨. 선뜻 수인사를 나누고 모임장소로 함께 이동했다. 인천공항을 출발, 모스크바를 거쳐 민보디로 비행하고 이어서 4시간 넘게 테스콜을 향해 달렸다. 긴 여정 끝에 도착한 테스콜에서부터 코카서스 산맥의 옹골찬 봉우리들이 나를 반겼다.


트레킹 출발 3일째 체켓봉 중간지점까지 고소적응 훈련을 시작했다. 멀리 엘부르즈 서봉과 동봉, 그리고 야생화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온양에서 온 이관수님의 재치있는 농담을 대원들이 유쾌하게 받아치며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다음날 캐이블과 리프트, 그리고 설상차로 우리의 전진 기지 산장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들이 돌발했다. 먼저 각자의 짐을 옮겨야 하고 한국에서 가져온 일용할 양식들이 내 입맛에 맞지 않고 잠자리 또한 이층 침대로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시각각 모습을 달리하는 엘브러즈 피크와 코카서스 산맥의 힘찬 능선들이 사소한 불편을 무색하게 했다.


이틀간 퓨리엇 산장과 파트코브락 아래까지 고소적응 훈련 후, 트레킹 출발 6일째 새벽 2시녘에 드디어 정상공격을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설산은 인간에게 더욱 가혹하다. 추위와 산의 위용이 내뿜는 기운 앞에서 나는 속수무책이다. 이중화와 크램폰의 무게도 만만찮게 내게는 부담이고 제대로 먹지 못해서 소화도 멈춘 듯 했다.


울트라 러닝이 몸에 배어있는 탓에 나는 거리와 난이도에 따라 체력을 안배하는 습관이 있다. 그러나 새들(Saddle)을 지나 정상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나는 체력을 거의 소진했다. 거리가 아니라 고도가 주는 신체적, 정신적 피로도는 일반산행과 견줄 수 없을 만큼 힘들었다.


정상은 이미 사람들로 북적였다. 고소를 느낄 겨를도 없이 나는 환희와 감동으로 엘브러즈 풍광을 즐겼다. 시선이 닿는 먼 곳까지 힘차게 펼쳐진 코카서스 산맥은 오직 엘브러즈 정상에서만 맛볼 수 있는 감동이리라.


대원들과 사진을 찍고 이내 하산을 시작했다. 하산 길 또한 장관이다. 수려한 설산의 실루엣 너머로 감히 근접조차 할 수 없는 산맥의 자태가 눈과 마음을 즐겁게 했다.


산장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면서 벌써 마음은 산 아래로 내달렸다. 굳이 산장에서 쉴 것이 아니라 하산 직후 테스콜로 이동해서 휴식을 취한다면 시간과 고소회복에 더 효과적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스콜에서도 예비일에 특별히 준비된 활동이 없다보니 지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얘깃거리가 풍성해진 대원들과 등반경험을 공유하며 시간을 보냈다.


사람들은 왜 사서 고생 하냐고 한다. 그러게 말이다. 돈까지 들여가며 고생한다. 게다가 고생을 넘어 고행의 경지이다. 평지에서 잰걸음이 고산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천천히 한발 한발 내딛으며 성급한 마음과 욕심을 내려놓는다. 대자연 앞에서 말이 필요 없는 그 침잠의 시간을 통해 나는 열정, 겸손, 그리고 인내심을 담금질하듯 배운다. 산은 언제나 옳다. 그것이 내가 산을 오르는 이유이다.

 

 

 

걸아가는 사람이 제일 아름답더라
누구와 만나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제일 아름답더라
솜구름 널린 하늘이더라


- 작은 시편 『순간의 꽃』, 고은, p106 -


 

 

 

 

 

3. 열정은 잠들지 않는다.


- 혜초 고산가이드 김종호 대리
미팅 후 얼마지 않아 대원들은 김종호 대리를 등반대장으로 추대했다. 김대장의 표정과 말은 일관적이다. 난감한 상황, 대원들의 엉뚱한 요구에 언제나 신중하고 단호한 답변을 한다. 테스콜에서 휴식시간에 읽던 조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과 같은 82년생이란다.


“긴 세월을 평범하게 살며 얻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저 높은 데서는 한 달 사이에 체험한다.”는 예지 쿠쿠츠카의 명언을 인용하는 데서 나는 산에 대한 그의 진지함과 열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던하게 대원들을 정상으로 이끌었던 그의 리더십에 감사하고 또 나이 많은 아마추어 산악인들의 넋두리를 받아 준 그 마음살이에 더더욱 감사하다.

 

-고산에서 음악을 생각하다
나는 고산을 트레킹 할 때 산의 느낌에 따라 음악을 연관 짓는다. 아들과 마차푸차레를 바라보며 Gustav Mahler Symphony No.5 2악장을, 그리고 안나푸르나 봉우리는 Brahms Piano Concerto No.1을 연상했다.


남성스러운 코카서스 산맥이 부드러운 능선의 엘브러즈 산을 마주한 풍광에 나는 처음에 R. Strauss를 생각했으나 곧 Tchaikovsky Symphony No.5로 바꿨다. 그것이 엘브러즈의 부드러움과 웅장함을 더 잘 표현하는 듯해서. 앞으로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을 들을 때마다 나는 엘브러즈 등반을 상기하며 감회에 젖지 않을까. 그 또한 내게는 즐거운 일이다.

 

-산에서 지혜와 열정을 공유하다
등반 경험이 많은 양공진님은 5000m 이상은 신이 허락해야 오를 수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고산등반에서 비로소 몸의 취약한 부분이 드러난다고 하셨다. 아니나 다를까 찬공기 알러지가 있는 나는 하산 후 콧물로 곤욕을 치렀다.


그리고 인천에서 오신 김남섭님은 이미 다음 고산등반이 예정되어 있었다. 오래 전부터 암벽훈련을 상당히 해오셨다 한다. 등반대원 대부분이 킬리만자로와 임자체 등 고산등반 경험이 많았다. 그래서 짬짬이 귀동냥하는 즐거움이 꽤 컸다.


열정이 있는 사람은 그 아우라도 힘차다. 열정은 사람의 눈빛을 빛나게 하고 언어에 힘을 실어주며 삶에 대한 공동전선을 만들어 준다.
이별이 못내 아쉬웠지만 우리는 혜초트레킹에서 결국 다시 만날 것이라는 무언의 약속을 남기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안전 산행, 좋은 대화, 힘든 순간에 내밀었던 작은 손길들. 그 모든 것에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