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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실크로드 7 <서안>
작성자 서*도
작성일 2018.06.04


 

 

이번 여행의 제목은 분명 서안~우루무치 구간의 실크로드 탐방이다

따라서 일정이 서역으로 가는 방향이라면 서안에서 출발해 우루무치로 진행하는 일정이어야 하고

반대로 서역에서 들어오는 방향이라면 우루무치에서 서안으로 이어지는 일정이어야 했다

그런데 난 서안공항을 통해 중국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서안 탐방을 빼먹고  곧장 떠나

우루무치까지 간 다음 다시 서안으로 되돌아와 마지막으로 서안을 보려한다

이유는 비행기 스케쥴이 서안으로 들어오고(IN), 서안에서 나가는(OUT) 일정이었기에

어짜피 다시 서안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우루무치의 숙소에서 아침 도시락을 받아 일찍 공항으로 간다

우루무치~서안 간 탑승권을 받고 비행시간을 보니 3시간 30분으로 생각보다 길다

난 얼핏 서안~인천 간 비행시간인 2시간 30분보다는 적게 걸릴 것이라고 여겼는데

지도를 보고서야 우루무치~서안 거리가 서안~인천 거리보다 훨씬 길다는 것을 알았으니

지난 일 주일 동안 엄청 먼 거리를 이동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서안 공항에 내려 중식 후 여행 8일차의 진시황 병마용갱 관광에 나선다

서안은 섬서성의 성도로 관중평야의 한복판에 위치하였는데 

전체적 모양이 닭의 형태인 중국 영토 중심이어서 북경시각의 기준이 되는 곳이다

 

서안은 13개 왕조 1,300여 년 동안의 수도였다

진나라 때 근교의 함양(咸陽, 현재의 서안공항 일대)을 수도로 삼았고

이어 등장한 왕조  한나라 때 `자손들이 영원히 편안하기를 바란다(欲其子孫長安)`는 소원을 담아 `장안`이라고 하였다

8세기 당나라 최전성기 때 장안은 길이 37 km 의 성곽에 거대도시로서 인구는 무려 100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시가지는 바둑판같은 110개의 방(坊)으로 구획되었고 황궁에 이르는 주작대로를 중심으로 동구와 서구로 양분되었으며

각각에 동시(東市), 서시(西市)라는 시장이 섰는데 동시는 귀족과 관료가 이용했고 서시는 오아시스를 통해 들어온

서역상인과 일반인들로 붐볐는데 서시에는 서역을 뜻하는 `호(胡)`자가 붙은 노래, 춤, 옷과 먹거리가 판을 쳤다고 한다

대도 장안의 영화는 현종 때 안녹산의 난과 당말 농민전쟁을 거치며 점점 쇠퇴했다

현재의 서안은 14세기 말 명나라 때의 이름으로 주원장 때 수도를 남경으로 정하고 서쪽은 안정되었다라는 의미로 `서안`이라 했다

 

 

 

병마용(兵馬俑 Terracota Army)

 

1974년 밀농사 농부가 우물을 파다 최초 발견되었다

중국 역사상 최초로 전국을 통일한 시황제의 무덤을 지키듯이 지하에 장대한 규모로

실물 크기의 병사, 말, 전차 등 8,000점이 넘는 병마용이 늘어서 있다

당시 황제가 죽으면 섬기던 가신이나 병사도 순사를 했는데 병사가 죽으면 국력이 쇠퇴되기에

꼭 닮은 인형을 만들어 시황제의 무덤 동쪽 1.5 km에 부장갱을 만들어 매장한 것이다

아직도 발굴 중인데 현재 전체의 1/10 정도만 발굴된 상태이다

 

 

 

총 4곳의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병마용갱은 모든 중국인들이 한번은 보고자 하는 관광지인지라

이날도 엄청난 인파로 미어터질 지경이다

 

 

 

제1번갱.

보병군단으로

갱의 규모는 동서 길이 230 m, 폭 62m, 14,260 ㎡ 넓이이다

보병 6000명 중 1,000명만 볼 수 있고 5,000명은 미발굴 상태이다

모두 동쪽 방향을 향하고 섰는데 전국시대 진나라가 맨서쪽에 있었기에 이는 위협이 되는

동쪽의 나라들을 방어하는 의미이다

 

 

 

병마용을 대하는 순간 난 8천만 대군의 일제 사열을 받는 황제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고도로 훈련된 천하무적의 병단을 마주 대하는 듯하다

일동 경례 !!!!

일시에 내지르는 함성이 고막을 찢을듯 우렁차고 패기는 하늘을 찌른다

이 정도의 무력이라면 천하를 제패하고 남을 최고의 병단임에 확신한다...

 

진시황은 BC 246년 13세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22세부터 친정을 했고

38세가 되던 BC 221년 최초 중국 통일의 위업을 이루고 50세가 되던 BC 209년 사망했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2,200년 전에 이런 프로젝트를 완수했었다는 말인데 정말 대단한 일이다

눈앞에 직접 보고있어도 믿기지 않을 대작이다!!

우리 역사에 2,200년 전의 유적으로 병마용에 비견될 만한 유적이 어떤 것인지....

중국을 하늘처럼 떠받들던 조선의 유생들이 품었던 중화사상을 한심하다고만 여겨왔는데 잠간 혼랍스럽기까지 하다

 

 

 

 

 

1984년 4월 이곳을 방문한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병마용 군진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고 한다

" 해산 ! "

하지만 병마용은 아직도 복역 중이다

2,200년 동안이나, 초초초~~~~ 장기복무......

 

 

 

흙을 구워만든 토우인데 모두 다른 얼굴이다

몇 백개도 아니고 무려 6천 개나 되는데 어찌 이렇게 !!!!

 

 

 

앞 3줄과 조우 맨옆쪽 1줄의 병사는 무기를 소지하지 않은 채 화살받이다

날라오는 화살을 몸으로 막아 안쪽 병사들을 보호하는 목적이다

 

 

 

위의 사진들은 복구된 모습들이고 발견 당시 병마용의 두상이 모두 깨져 있고 손에 든 무기가 없어졌다

이는 누군가 갱 위를 가렸던 목구조물을 불태워 파괴하고 무기를 가져갔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한다

병마용에 관해서는 사마천의 사기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을 정도로 절대 비밀리에 만들어졌기기 아무도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한다

 

 

 

항우가 홍문연에서 유방을 만났을 때 항우는 유방을 죽일 의도로 칼춤을 추게 하는데

이때 유방은 항우의 의도를 미리 알아차리고 항우한테 함양(당시의 장안)을 먼저 차지하라고 권하고 목숨을 보존한다

이렇게 하여 함양을 점령한 항우는 이전부터 진나라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기에 진시황 무덤을 찾아 파괴한 것이라고 추정한다

 

 

 

하도 생동감있게 만들어져 말이 금방이라도 뛰쳐 나올 것만 같다

 

 

 

 

제2번갱.

갱의 규모는 길이 124 m, 폭 98 m

전차병, 기마병, 석궁수, 기마병

 

 

 

현재도 계속 발굴중인데 규모가 너무 어마어마해 어느 세월에 끝날지 모르겠다

 

 

 

 

고급 장군은 키가 190cm 이상이다

직급에 따라 신발끝이 쳐들린 정도가 다르다

 

 

 

 

기마병과 군마

군마가 이 시기에는 아주 작은 편이었다

물론 이후 한무제 떄 서역의 우수한 천마(한혈마) 품종을 들여와 대량 번식시키기 전이었다

 

 

 

 

발견 당시의 모습인데 갑옷 등의 색깔이 선명하다

하지만 공기와 접촉하며 산화되어 색이 바래버렸고 현재 전시된 병마용에서는 볼 수 없다

 

 

 

제3번갱.

지휘관 참모부로 68명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제4전시관

진시황 청동마차가 전시되어 있는데 오픈카와 캠핑카 형태의 두 종류 마차를 볼 수 있다

1.5 km 떨어진 진시황릉 주변에서 출토된 것이다

진시황릉 자체는 현재 전혀 발굴을 하지 않은 상태인데 만약 발굴한다면 유장품은 아마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청동마차, 오픈카 형태


 

 

 

 

청동마차, 캠핑카 형태

 

 

 

 

청동마차 주변으로 몰려든 각국의 사람들로 인해 정말 발 디딜 틈조차 없어 전시관을 빠져나오느라 진땀을 흘렸다

 

진시황은 자신을 비난하는 제자백가와 자신의 뜻과 다른 사상를 적은 책을 불태우는 분서갱유(焚書坑儒)을 일으키고

자신을 스스로 황제로 칭하는 등 폭군으로서의 면도 없지 않았지만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고 후대국가들의 통치기반을

정비하여 현재의 중국이 되는 밑거름을 닦았다

 

진시황은 통일된 진나라와 함께 영생을 꿈꾸었다

불로불사 약을 구하러 서복을 동쪽의 봉래산으로 보냈지만 서복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자신이 스스로 복용한 수은에 중독되어 전국통일의 위업을 이룬지 12년만인 50세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결국 진시황은 비록 길지 않은 생을 마감하고 땅속에 묻혔고 그가 죽고 4년만에 진나라는 멸망한다

 

2,200년의 세월이 흐른 후 진시황은 청동마차의 타임머신을 타고 황제의 위엄을 그대로 간직한 채 되돌아왔다  

그의 주변에 구름인파로 몰려든 현대인의 뇌리속에 신화적 존재로 되살아나

그가 그토록 원했던 불멸의 영생을 누리고 있는 듯하다

 

 

 

진시황릉(秦始皇陵  The Emperor Qinshihuang`s Mausoleum)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했던 시황제는 38년간 70만 명을 동원해 사후에 묻힐 지하 궁전을 조성했다.

진나라의 도성이었던 셴양(咸?)을 모방해 여산 기슭에 지었는데, 총면적이 56.25㎢에 달하며 병마용 박물관에서 1.5km 떨어져 있다.

현재의 고고학 발굴 기술로는 유물을 훼손하지 않고 온전히 발굴하기 어렵다고 판단해서 발굴하지 않고 있다

 

진시황릉 내부는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의 `시황본기`에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무덤 천장에 천체를 그렸고, 바닥에는 진나라 제국의 지리를 묘사했으며, 수은을 사용해 강과 바다를 표현했다고 한다.

무덤에 매장된 진귀한 보석과 유품을 지키기 위해서 침입자가 나타나면 즉각 석궁이 발사되도록 설계했다.

무덤 입구를 영원히 비밀로 유지하기 위해서 축조 공사가 마무리되자 인부 모두를 산 채로 매장했다는 기록도 전해 온다

 

 

병마용갱에서 1.5km 떨어진 여산에 위치하고 있다 

 

 

 

표지석 우측으로 낮은 구릉처럼 보이는 둥그스럼한 피라미드가 진시황릉이다

사마천의 기록에 진시황릉의 높이가 500척이라고 했는데 당시 1척이 22.5cm이었으니 112.5m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세월의 무게에 짓이겨져 현재 높이는 72m이다

 

지하 35m에 동서 길이 170m, 남북 길이 145m의 묘실이 있다

사마천의 `진시황본기`에 따르면 이 안에 자동으로 화살이 발사되게 되어있어 도굴을 못하도록 만들어졌다고 한다

또한 수은으로 하천과 바다를 만들어 쉬지 않고 흐르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회족거리

온갖 먹거리로 넘쳐난다,

왠지 나의 구미를 당기는 음식이 눈에 띄지 않을 뿐이다

 

 

 

 

 서안의 숙소

 

 

 

 

 

 

대안탑(大雁塔  Giant Wild Goose Pagoda)

 

652년 당나라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과 불상을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대자은사 경내에 위치하였다

대자은사는 648년 당나라 고종이 일찍 사망한 그의 어머니 문덕왕후의 명복을 빌고

어머니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에서 지은 절이다

높이 7층 64 m로 처음에는 5층이었지만 측천무후가 10층까지 증축하였고 이후 지진으로 현재 7층만 남았다

외부는 벽돌로 지어졌지만 내부에는 나선형 계단이 있어 올라갈 수 있는 구조이다

 

 

 

 

현장은 13세에 출가하여 불법을 공부하던 중 번역된 경전과 원본이 맞지 않는 것을 알고

27세이던 629년 진정한 깨달음을 찾아 천축(인도)으로 떠나 불경을 구해 16년만에 귀국하는데

불경을 가져오기까지의 여정을 담은 여행기가 `대당서역기`이고

이를 바탕으로 명나라 때 오승은은 `서유기`를 지었다

 

 

 

 

대안탑이라고 부르게 된 전설은

육식하는 것을 금기시하지 않던 계파의 스님에게 어느 날 고기가 떨어졌을 때

마침 하늘을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며 오늘은 보살님이 우리에게 고기를 좀 주면 좋겠다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맨선두에서 날아가던 기러기가 날개를 부러뜨려 땅바닥에 떨어졌다고 한다

놀란 스님들은 보다 더 정진하라는 보살의 계시로 알고 기러기가 떨어진 자리에 탑을 세우고

이후부터 육식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상으로 실크로드 여행기를 마친다

이번 여행에서 난 실크로드의 극히 일부분만을 보았을 뿐이다

물론 향후 서역북로 중 천산남로, 중앙아시아,이란 등 세 번 정도 더 실크로드 여행을 생각하고 있다

여행을 떠나기 전 관련 서적 8권을 구입해 읽었고 인터넷을 통한 관련자료들도 적지 않은 시간 찾아 보았다

그런데 지난 4월 여행을 다녀온 후 막상 후기를 쓰려고 하니 어떻게 써야할 지 몰라 한동안 망설였다

들른 곳마다 유서 깊고 갈무리할 메시지가 심원하다는 것을 알기에 어설픈 후기는 남기지 않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서툰 후기일망정 마무리를 지어야 곧 떠날 트레킹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걸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강박감을 느꼈다

사유가 얕고 붓끝이 무딘데다 서둘러 작성하느라 내용이 신통치 못함에도 이렇게 후기랍시고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