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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중앙아시아]키르기스스탄 천산산맥 트레킹 9일
작성일 2018.10.27
작성자 이*진
상품/지역
트레킹몽골/중앙아시아/바이칼
끝없는 설산행렬 천산산맥을 섭렵하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와 농사에 전념하는 귀촌생활로 세월을 낚는다. 그것 또한 보람된 추억임에 틀림없지만 어디론가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이 불쑥불쑥 일어난다.
더구나 올해 여름은 더위가 극성을 부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고 열대야로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어 떠나고픈 마음은 더욱 간절해진다. 허나 한참 바쁜 농번기라 감히 입을 떼지 못하고 견디어 낸다.
더위도 세월에 밀려 서늘한 바람이 슬슬 불어오고 살만한 계절이 다가온다. 그때 키르기스스탄 천산산맥 트레킹 정보가 눈에 들어온다. 반가운 마음에 일단 예약한다. 갈지 못 갈지는 모르지만 저지르고 본다.
몇 해 전 아내와 실크로드로 여행을 갔을 때 천산산맥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천산산맥이 낯설지 않고 이번엔 걸어서 올라간다니 기대가 크다. 벌써 엔도르핀이 팍팍 도는 게 아마 중독증세인 듯하다.
트레킹 시기도 가을이라 수확을 잽싸게 마치고 떠나면 마님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트레킹과 힐링이 어우러진 코스라서 체력적인 부담도 크지 않다고 말하니 왠지 안심이 된다.
미지의 나라로 트레킹을 떠날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진다. 유례없던 혹독한 폭염이 서서히 물러나면서 파란하늘에 흰 구름이 둥실둥실 가을이 찾아온다. 물러나는 더위도 반갑지만 트레킹을 떠날 날이 가까워지니 더욱 즐거워진다.
우연인가 필연인가 떠나기 전 교육방송 테마기행에서 키르기스스탄 편이 방영된다. 그 어느 때보다 관심이 쏠려 놓치지 않고 시청한다. 물론 각색과 편집을 했지만 화면으로 보는 천산산맥은 가히 장엄하고 통쾌하다. 저기를 내가 몸소 간다 생각하니 가슴의 설렘은 요동을 치고도 남는다.
드디어 떠나는 날 10월 9일이 밝는다. 해외트레킹 경험이 많아서 그런지 짐 꾸리는 일은 이골이 난다. 사계절에 대비한 옷과 장비 그리고 행동식을 빠짐없이 챙겨 공항으로 향한다.
공항 나갈 때 항상 느끼는 거지만 왜 그리 들뜨는지 어린애 소풍가는 기분이다. 산행이 고행인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티켓을 수령하고 간단한 설명을 들은 후 개별 체크인을 시도한다.
많은 인파로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린다. 산행의 내공이 강하게 느껴지는 등산복의 한 여성이 나타난다. 그 포즈와 아우라가 일행임을 직감한다. 애써 의식하지 않고 나중에 자연스럽게 알게 되리라 믿는다.
그런 가운데 차례가 되어 여권과 티켓을 승무원에게 내미니 탑승권이 이미 발부되어 가이드가 가지고 있다고 한다. 순간 짜증이 나서 가이드에게 전화하니 죄송하게 됐다며 단체수속을 하라고 한다.
단체수속 카운터로 돌아가니 가이드가 재차 사과한다. 그럴 수 있는 일이니 너무 미안해하지 않기를 말하고 탑승권을 받아 짐을 부친다. 그런데 일행의 명단을 보고 깜짝 놀란다. 일단 여성일행이 절반이 넘고 연령대도 70대를 비롯해 60대가 주류를 이룬다. 내가 잘못 동참한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어차피 겪어보면 알 것으로 치부하고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한다. 그 순간 승무원이 대한항공 100번째 탑승기념으로 비즈니스라운지를 이용할 수 있는 행운을 전해준다. 빨리 들어가 라운지에 느긋하게 쉬고 싶은 마음뿐이다.
자동출입국심사를 마치고 면세점에 들려 소주를 구입하고 라운지로 향한다. 한쪽에 널찍한 자리를 차지하고 음식을 갖다 먹는다. 포도주도 곁들여 배를 충분히 채운다. 아내와 딸에게 카톡하며 잘 다녀오겠다고 다짐한다.
탑승시간에 맞춰 게이트로 가서 탑승한다.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를 향한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공항체증으로 출발이 다소 지연된다. 환승이 조금 걱정되지만 나만의 걱정이 아니라고 위안을 삼는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영화 히말라야를 감상한다. 이미 본 영화지만 산에 가는 이유를 반추하기 위함이다. 산은 정복하는 게 아니라 잠시 머무는 것이라는 감동적인 교훈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럭저럭 7시간 비행 끝에 타슈켄트 공항에 도착한다. 트랩을 내려 버스를 타니 밤하늘에 반달이 반긴다. 그것도 잠시 환승을 위해 다시 체크인을 서두른다. 시간적인 여유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승무원의 서투른 조작으로 시간이 흐른다. 그래도 기다리는 방법밖엔 없다. 악명 높은 타슈켄트 공항의 진수를 체감하는 순간이다. 그래도 많이 좋아진 상태라고 하니 예전엔 어땠는지 짐작이 간다.
간신히 탑승권을 받아들고 보안검색에 임한다. 신발을 벗고 벨트와 지갑을 모두 쏟아내어 검색대를 통과한다. 요원은 모두 군복을 입고 있어 분위기가 참으로 긴장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통과되었으니 다행이다.
배정된 게이트에서 환승을 대기하는데 커다란 삼성 TV가 눈에 들어온다. 투우경기 방송이 이색적이다. 가이드에게 묻고 싶지만 참는다. 한국과 4시간시차가 느껴진다. 이미 서울은 한밤중이다.
드디어 키르기스스탄의 비슈케크를 향하는 비행기에 오른다. 좌석은 여유가 있어 편하게 앉는다. 잠시 눈을 부치는 동안 도착 멘트가 나온다. 11시 반 비슈케크 마나스 공항에 도착한다. 싸늘한 추위가 오싹 느껴진다.
의외로 빠른 입국심사를 마치고 나가니 어김없이 현지 가이드가 환영한다. 대기하고 있던 대형버스에 짐을 싣고 호텔로 향한다. 가이드 이경수 부장이 막간을 이용해 키르기스스탄에 대해 설명한다.
인구는 500만명 정도로 순수하고 교민은 1,500명이 살고 있으며 해발 700미터에 위치하여 가장 살기 좋은 고도라 말한다. 중앙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민주화를 추진하고 한류의 영향으로 한국을 선호하는 편이란다.
한국과 3시간의 시차를 알려주며 내일은 7시 기상, 8시 식사, 9시 출발을 알린다. 10시에 광장 교대식을 참관할 예정이란다. 버스가 시내로 들어서자 컴컴한 가운데 나무가 상당히 많이 보인다.
가이드 말로 나무들은 함부로 베지 못하고 국가에서 총괄적으로 관리하기 때문에 울창하다는 설명을 들으니 조금 이해가 간다. 사회주의 국가의 통치체제의 산물로 고귀한 자산이 아닐 수 없다.
예약된 리치호텔에 도착하니 벌써 12시 반이다. 112호 싱글 방을 배정받고 피로를 풀기위해 샤워부터 한다. 컵라면으로 출출함을 때운다. TV도 소리가 나오지 않는 열악한 호텔이지만 하룻밤은 문제없다.
그래도 와이파이는 터져 아내와 카톡하고 잠을 청한다. 이미 잠 때를 놓쳐 숙면은 기대난망이다. 선잠으로 몸이 찌뿌듯하다. 3시간의 시차도 크다. 7시 기상하여 간단히 짐을 정리하고 호텔 주변을 둘러본다. 싸늘한 기운이다.
소박한 호텔식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시내관광에 나선다.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볼거리가 약하다. 의사당을 지나 ‘알라토’ 광장에 이른다. 그런데 어제 말했던 교대식이 열리지 않는다. 공사로 인해 잠정 중단한 모양이다.
실망을 뒤로하고 일행은 승리광장으로 향한다. 그런데 묵묵히 따라오는 두 사나이가 있다. 산악가이드 ‘디마’와 현지가이드 ‘루슬란’이다. 우리의 여정을 도와 줄 긴요한 인물이다. 말을 잘 통하지 않지만 표정만으로도 통한다.
승리광장에 꺼지지 않는 불꽃을 보니 러시아 혁명문화가 그대로 느껴진다. 여기서 이들 유목문화 ‘유르트’를 배우고 안녕이란 말 ‘살렘’도 가르쳐준다. 또한 국화가 튤립이라는 사실도 빼놓지 않는다.
시내관광을 마치고 이른 점심을 하러 간다. 오후 산행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서울식당’이라는 한국식당에 가니 주문한 점심이 제공된다. 나는 육개장을 주문했는데 한국의 맛이 난다. 긴 산행을 대비해 든든하게 먹는다. 이때 일행들의 간단한 소개가 이루어진다. 전국 곳곳에서 다양한 산객들이 한자리에 모인 느낌이다. 내심 의아스럽지만 존경하고픈 기분이다.
이른 점심인데도 모두 뚝딱 한 그릇씩 비우고 자리를 뜬다. 버스로 한시간정도 달려 ‘알아르차’ 국립공원에 도착한다. 각자 장비를 챙기고 복장을 점검한 후 몸을 풀고 산행을 시작한다. 12시 20분이다.
싸늘한 바람을 맞으며 시작한 산행은 서서히 오르막에 접어든다. 숨이 차고 땀이 나도 바람은 상쾌하다. 파란 하늘을 바탕으로 돋보이는 설산의 행렬이 멀리서 손짓한다. 천천히 오라는 무언의 암시라 여겨진다.
한 시간 올랐을까 ‘브로큰허트’를 지난다. 추억의 인증 샷을 남기로 폭포를 향해 돌진한다. 보이지 않는 폭포지만 목표를 정하는 게 좋다. 산행하기에 딱 좋은 날씨인데 기상이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큰 산허리를 돌고 돌아 한걸음씩 옮기다 보니 폭포지점을 지난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애써 선두그룹을 따른다. 설산은 손에 잡힐 듯 가깝지만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은 멈춰야 끝이 날 듯하다.
폭포를 지나면 깔딱 고개를 3개를 넘어야 한다. 쉼 없는 오르막 돌길에다가 눈길이라 위험해서 속도가 나지 않는다. 여기서 선두와 후미가 상당히 벌어진다. 특히 아이젠을 챙기지 않는 실수로 모두 힘든 등반을 감내해야 한다.
이때부터 가이드는 아이젠 트라우마가 생긴다. 눈만 보면 아이젠 악몽이 되살아난다. 오늘 오를 때는 그렇다 치고 내일 내려갈 땐 정말 큰일이다. 아마 특별한 대책을 강구할 태세다. 우린 가이드만 믿는 수밖에 없다.
기묘한 산세 위력을 느끼면서 깔딱 고개를 하나씩 넘는다. 숨이 차오르고 호흡이 거칠어지는데 선두는 조금도 처지지 않는다. 여기서 선두를 버리고 나만의 페이스로 가기로 한다. 가랑이가 찢어질 정도로 빠르기 때문이다.
두 번째 깔딱 고개부터 앞서가는 사람이 박수 받는 세상이 무색함을 피력하면서 걸음을 힘겹게 옮긴다. 끝나지 않는 눈길 오르막이 야속하다. 그래도 아득히 보이는 선두그룹이 일행이라는 사실에 큰 위안이 된다.
오후가 되면서 날씨가 변하여 사방은 안개커튼으로 휩싸인다. 기온도 떨어지면서 추위가 몰려온다. 이럴 때는 짧은 휴식과 꾸준한 걸음만이 살길이다. 마지막 있는 힘을 다하여 마지막 깔딱 고개를 넘는다.
후미는 어디쯤 오는지 궁금하지만 상당히 벌어진 것은 틀림없다. 가이드가 있지만 이런 눈길을 아이젠 없이 나이 든 여성분들이 오르는 것은 무리다. 나도 힘겨운데 얼마나 고될까 여겨진다. 그런데 뒤처지지 않으려고 묵묵히 걸음을 내딛는 지긋한 여성이 목격된다. 정말 존경심이 우러나온다.
그런 마음도 사치라 여기고 산장을 향해 힘차게 오른다. 안개커튼이 걷히다 말다 반복하면서 시계는 불투명하다. 그 순간 갑자기 산장이 성큼 다가온다. ‘라첵산장’이다. 그런데 우리가 묵을 산장은 조금 더 가야한단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오른다. 그 무시한 세 개의 깔딱 고개를 오른 나는 오히려 여유가 생긴다. 마침내 더 이상 갈 데 없는 오늘의 목적지 ‘라이트하우스’에 도착한다. 오후 5시 4시간 40분의 산행이 끝난다.
먼저 도착한 선두그룹이 반가이 맞아준다. 마치 형이 동생을 돌보듯 따스한 마음이 전해진다. 부엌에 달려가 온기를 느끼면서 따뜻한 차 한 잔으로 몸을 녹인다. 전신이 사르르 풀리면서 긴장도 풀린다.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조금 후 가이드 이부장이 도착하고 산장을 배정한다. 배정된 자리에 침낭을 갖다 놓고 주변을 정리한다. 보온을 위해 내피를 입고 털모자도 쓴다. 고산에서는 무엇보다 체온을 유지하는 것이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따스한 밤을 위해 가져간 물주머니에 뜨거운 물을 채워 침낭 속에 넣는다. 다들 부러워하는 눈치다. 안나푸르나 산행에서 익힌 노하우를 제대로 써먹게 돼서 흡족하다. 이제는 일행이 모두 올 때까지 기다리는 일만 남는다.
한두 분씩 힘겹게 산장에 도착하는데 갑자기 비보가 전해온다. 한분이 결국 올라오다 포기하고 내려갔다는 소식이다. ‘루슬란’이란 가이드가 데리고 하산했다니 걱정은 되지 않는다. 다만 모두 함께하지 못함이 아쉬울 뿐이다.
어느새 시간은 흘러 산장 밖은 어둠이 내려앉는다. 기온도 내려가 차가운 기운이 감싼다. 아직도 산장을 향해 부지런히 오르는 일행이 있어 우려된다. 아무쪼록 무사히 도착하기를 기원하지만 점점 초조해진다.
마침내 산악가이드 ‘디마’가 행동에 나선다. 올라오고 있는 일행의 배낭을 매주고 어둡고 위험한 산길을 밝히기 위해 성급히 내려간다. 이젠 그야말로 가이드만 믿고 조속히 오기만을 기다린다.
얼마 시간이 지났는지 마지막 일행이 산장에 도착한다. 박수로 환영하면서 수고했다는 말을 아끼지 않는다. 벌써 7시가 지난다. 선두와 2시간 이상의 차이가 벌어진 것이다. 당초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일행이 모두 모이자 저녁이 준비된다. 산장의 조그만 부엌에서 순박한 현지 여성이 요리에 열중한다. 뭔지 궁금하지만 참고 기다린다. 혜초에서 마련한 한국식 밑반찬도 꺼낸다. 한상이 차려지자 허기를 달랜다.
가져간 소주도 일행과 나눠 마시며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또한 위스키를 준비한 어르신이 한잔을 권해 반가이 마신다. 심신이 피곤한 차에 알코올이 들어가니 얼큰한 기운이 온몸을 휘돈다. 나른해지면서 기분이 좋다.
잠 때를 놓치기 싫어 침낭에 몸을 맡긴다. 다소 이른 시간이지만 내일 아침 빙하 트레킹을 위해 잠을 청한다. 한잠을 자고 깨보니 12시다. 밖으로 나가 소변을 보며 별구경을 해본다. 춥지만 반짝반짝 영롱한 별들이 아름답다.
다시 산장으로 돌아와 잠을 청하지만 선뜻 들지 않는다. 따스한 물주머니 덕분에 추위는 모르지만 달콤한 꿈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리저리 뒤척이며 자다 깨다를 반복하면서 새벽을 맞는다. 쌀쌀하지만 맑은 날씨다.
아침 6시에 기상하여 약식으로 세면과 양취를 하고 누룽지와 오믈렛으로 식사를 한다. 트레킹에 대비해서 먹기 싫어도 배를 채운다. 산행에 필요한 최소한의 짐만을 배낭에 담는다. 빙하트레킹을 원치 않는 사람들은 산장에 남아 휴식을 취하고 나머지는 트레킹을 나선다.
산장을 나서자 바로 급한 오르막으로 길을 잡는다. 싸늘한 날씨지만 서서히 밝아오는 상큼한 해가 멀리서 반긴다. 오르면 오를수록 산장은 성냥갑으로 변하고 햇빛을 머금은 설산의 위용은 기세가 등등하다.
파란 하늘에 흰 눈이 쌓인 천산산맥을 조망하면서 한걸음씩 옮긴다. 힘은 들지만 주변에 펼쳐지는 파노라마가 모든 걸 잊게 한다. 큰 산허리를 돌자 다시 급격한 오르막 능선이 앞을 막는다. 저 능선까지 올라야 한다는 말에 포기하고 싶지만 예서 그칠 수 없는 노릇이다.
있는 힘을 다해 선두를 쫓아간다. 늘 그러하듯이 끝은 있는 법 사방이 확 트인 능선 꼭대기에 이른다. 새파란 하늘에 장엄한 산세가 장관을 이루지만 바람도 거세 소리가 장난이 아니다. 고도 3,200미터 모습이다.
모두 이 순간을 사진에 고스란히 담고자 멋진 포즈를 취한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서로 찍어주면서 산행의 고단함을 사뿐히 내려놓는다. 어제의 안개 커튼 속에서 헤매는 산행과 완전 다르다. 이렇게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어제 그렇게도 흐리고 찌푸린 것이 아닌가 싶다.
설산의 파노라마를 보고 느끼고 호흡하면서 동영상도 찍고 즐기는 시간은 왜 그리 짧은지 벌써 내려가야 한다. 그 순간 나이 드신 여성분도 바로 옆에 있음을 깨닫는다. 어제 목격한 그 분이다. 재차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산은 잠시 머무를 뿐이라는 진실을 깨닫고 발길을 돌려 산장으로 향한다. 얼른 내려가 일행들과 맛난 점심을 하고 어제 출발한 곳까지 하산해야 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내려오는데 오르고 있는 후미를 만난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기를 응원하면서 고도를 천천히 낮춘다. 오를 때 몰랐던 높이에 스스로 감탄하면서 화창한 햇볕에 반사되는 설산의 경치를 바라본다. 참으로 감동스럽고 놓치고 싶은 그림이지만 발걸음을 재촉한다.
산은 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가 더 힘들고 위험하다. 가능한 무릎에 부담이 가지 않도록 배려한다. 몸에 땀은 나지 않지만 긴장은 늦출 수 없다. 그렇게 온갖 신경을 쓰며 산장에 도착하니 따스한 햇볕이 주위를 맴돈다.
도착하자마자 준비된 컵라면을 김치와 뚝딱 해치운다. 백숙도 준다는 말에 큰 기대를 하지만 막상 접하고 나니 도강탕 수준이다. 그래도 따스한 국물이 먹을 만해서 쭉 마신다. 가볍게 점심을 해결한 것이다.
일행들은 짐을 챙기고 다시 떠날 준비를 서두른다. 이미 가이드가 연락해 아이젠이 올라오고 있다니 도착하면 바로 출발이다. 어제 실수를 만회하려는 가이드의 애로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밤새 얼마나 초조했을까 짐작된다.
막간을 이용해 나는 산장벤치에 앉아 내리쬐는 햇볕을 만끽한다. 코발트색 하늘에 따스한 햇볕을 쬐며 설산을 바라보는 여유는 평화 그 자체다. 간간히 불어오는 시원하고 상쾌한 바람이 햇볕을 시샘하는 듯하다.
이런 낙원을 두고 내려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굴뚝같다. 허나 하산시간이 다가온다. 가이드는 더욱 안달이 난다. 온다던 아이젠은 아직 소식이 없기 때문이다. 일행 중 아이젠 없으면 안 간다고 으름장을 놓는 분도 있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하산을 시작하고 위험구간에서 아이젠을 착용하기로 한다. 12시 무렵 인원 점검하고 출발한다. 따스한 햇볕을 등에 맞으며 내려가는 하산 길은 어제와 대조적이다. 걷다보니 더워져 외투를 벗어 던진다.
눈길을 조심조심 내려가다 보니 어제 올라온 깔딱을 마주한다. 맨발로 내려가기에는 무척 위험하다. 다들 어찌할까 망설이는데 멀리 가이드가 아이젠을 짊어지고 올라온다. 하나씩 꺼내어 주고 착용을 도와준다.
익숙하지 않는 구형 아이젠이지만 그래도 차는 것이 나을 듯해서 착용해 보는데 쉽지 않다. 간신히 착용하고 빙설구간을 통과하는데 훨씬 낫다. 발에 힘이 붙는 느낌이 들어 안심이 된다. 아이젠의 위력이다.
부지런히 내려와 눈길구간을 벗어나자 아이젠이 귀찮아진다. 자꾸 벗겨지는 이유도 있지만 무게가 있어 발걸음이 무겁다. 재빨리 벗어 손에 들고 가는데 뒤따라오는 박대장이 순수 넘겨받으니 매우 고마워진다.
이제 하산은 그야말로 탄탄대로 즐기면 된다. 가다가 지치면 바위에 앉아 간식을 먹으며 산세를 둘러본다. 아이젠 없이 내려간 선두는 보이지 않는다. 대단한 산객이다. 난 서둘러 내려갈 이유가 없어 제대로 게으름 펴본다.
한없이 큰 산길을 홀로 유유자적 걷은 기분을 무엇에 비유할지 모르지만 대자연을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인간은 비록 작지만 꾸준히 내딛는 발걸음은 참으로 대견함을 외치고 싶은 기분이다. 진짜 날아갈 듯 기쁘다.
어제 오른 길을 내려가면서 이렇게 긴 길인가 반추하며 열심히 내려간다. 어느덧 ‘브로큰허트’를 만난다. 이제 한 시간만 가면 된다. 그런데 여기부터 지루해지면서 발이 아파온다. 속도를 늦추며 숲길을 마음껏 누빈다.
해는 뉘엿뉘엿 지면서 싸늘한 기운이 몰려온다. 얼른 바람막이를 챙겨 입고 체온을 유지한다. ‘산은 여럿이 같이 가지만 결국 혼자 가야한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목적지를 향한다. 멀리 산장입구가 보이면서 마음이 놓인다.
긴 내리막의 끝은 어디인가 궁금했는데 바로 버스다. 현지가이드 ‘루슬란’이 박수로 맞이해주니 마치 한국 산악회를 온 듯하다. 거기다 하산주로 ‘아르파’ 맥주와 멜론을 안주로 제공하니 감격한다. 시원하게 한잔 기가 막힌다.
시간은 3시 반이다. 아직 하산하지 않은 일행이 많다. 버스에 배낭을 놓고 다시 맥주 한잔을 시도한다. 역시 죽인다. 산행 후에 먹는 모든 건 맛있다. 날씨가 추워져 버스 안에서 일행을 기다리기로 한다.
대기하는 시간이 무료한지 잡담이 시작된다. 어디가나 58년 개띠는 티가 나는지 인천공항에서 만난 그 여성이 다가와 나이를 묻더니 맥주를 가져와 따라준다. 갑자기 친구라고 부르며 동료애를 발동한다.
재빨리 내가 직접 농사지은 땅콩을 안주로 꺼내 화답한다. 오고가는 술잔에 야릇한 우정이 싹튼다. 그러나 너무 많이 마시면 곤란할 듯해 참는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지켜보고 있고 저녁도 먹어야 하니까 말이다.
언제나 일행이 다 올까 산 쪽을 바라보며 지루한 시간이 무참히 흘러간다. 한 시간여 지났을까 힘든 산행을 호소한 여성일행들이 도착하고 최고령의 어르신이 마지막을 장식한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에 박수로 환영한다.
아무래도 이번 산행은 아이젠도 문제지만 나이 드신 분들이 오르기엔 다소 힘겨운 코스라는 생각이 든다. 산행을 잘하는 선두와 쫓아가는 후미가 너무 많은 차이를 보여 산악가이드로서 무척 난감하리라.
어쨌든 아무런 일없이 산행을 마친 것을 축하하며 버스는 호텔로 향한다. 오늘 숙소는 ‘골든드래곤’ 오성급 호텔이다. 도착해 501호 방을 배정받는다. 방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놀란다. 잠시 망설이다 그냥 들어간다.
싱글로 알고 있었지만 방의 숫자가 많을 뿐만 아니라 방의 크기도 장난이 아니다. 침실을 비롯해 응접실과 접견실 그리고 키친이 따로 있고 화장실도 두 개나 된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게 바로 스위트룸이란다.
이러한 최고급 방을 홀로 쓴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짐을 풀고 샤워로 피곤을 씻어낸다. 와이파이도 잘 터져 그 동안 찍은 사진과 동영상을 가족과 지인에게 날린다. 오지에서 문명의 세상으로 귀환한 것이다.
잠깐 달콤한 쉼으로 신수가 훤해진다. 시간에 맞춰 ‘강남식당’으로 내려가 저녁을 즐긴다. 미리 주문한 얼큰한 참치 김치찌개가 코를 자극한다. 미리 챙겨간 소주를 반주로 먹는 김치찌개가 짱이다. 게다가 가장 늦게 하산하신 어르신이 미안하다는 의미로 보드카를 내신다.
한쪽에서는 소주로 이쪽에서는 보드카로 주거니 받거니 흥겨워진다. 두병의 보드카를 비우고 나서야 자리를 파한다. 취하지는 않지만 얼큰해서 기분이 좋아진다. 일단 방으로 돌아가 내일을 대비한다.
응접실에 앉아 TV를 키고 BBC 뉴스를 본다. 별 재미가 없다. 문득 스위트룸의 추억을 남기기 위해 각 방의 사진을 찍어 딸에게 보낸다. 딸도 축하한다며 회신한다. 정말 후회되지 않도록 만끽해야할 밤이다.
고민 끝에 맥주를 사기 위해 호텔 밖으로 나선다. 밤에 홀로 나서는 일이 위험하지만 용기 내어 근처 가게를 찾는다. 마침 가까운 곳에 슈퍼가 있어 다행이다. 원하는 맥주를 집어 들고 계산하는데 달러가 통하지 않는다.
환전도 되지 않아 구입에 실패한다. 빈손으로 허탈하게 호텔로 돌아온다. 로비에는 사람들이 저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나는 바에 다가가 맥주를 주문하면서 달러를 받는지 확인하다. 여기는 된다는 말에 탄성이 나온다.
시원한 맥주가 목줄을 타고 넘어가 전신에 퍼진다. 짜릿한 맛이 외로움을 떨친다. 오늘 산행 경로를 떠올리면서 감동적인 순간을 만끽한다. 1박2일의 ‘알아르차’ 국립공원 산행을 이렇게 마무리하고 깊은 잠에 빠진다.
꿀잠을 자고나니 새벽 4시 반이다. 한국시간으로 아침이라 딸에게 카톡으로 안부를 전하고 태국여행 중인 아내의 소식도 접한다. 한국과 키르기스스탄 그리고 태국을 연결하는 딸이 바쁘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묘한 기분이다.
오늘은 산행이 없고 ‘카라콜’ 지역으로 이동하는 날이다. 호텔에서 뷔페로 아침을 먹고 8시에 버스로 출발한다. 오랜 동안 이동하므로 지루한 시간이 될 듯하다. 주변 풍경을 보며 마음을 비우고 가는 게 상책이다.
버스가 출발하자 가이드는 마이크를 잡고 말하기 시작한다. 키르기스스탄에 대한 얘기다. 국민의 반이 수도 ‘비슈케크’에 살고 있고 우즈베키스탄과 한때 가스와 물이 차단되어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도 언급한다.
결혼 문화를 소개하는데 3만불 정도의 큰돈을 써야한다니 놀랍다. 월급이 평균 150불인데 빚을 져서 친지들에게 과시하는 허례허식이 문제다. 가장 큰 비용으로 말을 잡는데 2천불이 소요된다. 제일 맛있는 고기가 말고기라는 말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어디가나 독특한 문화는 있기 마련이다.
교육에 대한 관심이 있어 물어보니 대학 등록금은 600불이고 20세에 졸업하는 게 보통이다. 대부분 18세가 결혼적령기로서 결혼하고 학교를 다닌다. 어린나이에 살림을 차리고 공부하는 일이 상상되지 않는다.
버스는 시내를 벗어나 고속도로로 진입한다. 고속도로라고 하지만 우리네 고속도로가 아니라 조금 넓은 도로라 생각하면 된다. 중국에서 건설했다는 말에 다소 의아스럽다. 그래도 속도를 낼 수 있으니 다행이다.
창밖으로 굴뚝같은 것이 보이는데 ‘때찌’라는 중앙난방이다. 석탄을 연료로 온수를 주민에게 공급하는 시스템으로 4개가 있다고 한다. 사회주의체제에서 국가가 난방을 책임지는 전형적인 예다.
지나가는 말로 맥도날드 패스트푸드가 들어오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기가 막힌다. 이 국가에서는 모든 조리법을 공개해야 하는데 맥도날드는 이를 수용할 수 없어 진입을 포기했다고 한다. 참으로 흥미로운 얘기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이동시간의 지루함을 잊는다. 좌우로 펼쳐진 땅을 보니 매우 부럽다. 겨우 7%로만 경작하기 때문에 빈 땅이 많단다. 주요 수입원은 광물로 금광개발이 인기가 있다고 한다. 광물개발에 혹해서 낚인 우리나라 피해자 특히 연예인도 간혹 있다고 하니 이해가 간다.
길가에 커다란 미루나무가 즐비하다. 그런데 밑 부분 일 미터 정도 하얗게 석회로 칠을 했다. 궁금했는데 두 가지 이유가 있단다. 매년 4월에 칠하는데 벌레퇴치 뿐만 아니라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 역할을 한단다. 재미있다.
천산산맥은 250키로로서 엄청난 스케일을 자랑한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설산의 파노라마는 눈을 즐겁게 한다. 지금 달리고 있는 고속도로는 중국이 육로수송을 목적으로 지원한 것이란다. 여기도 중국제품이 90%를 차지하여 중국의존도가 매우 높다. 그 다음으로 터키가 주류를 이룬단다.
러시아와 관세동맹을 억지로 맺었지만 효과는 없고 매년 200만 관광객이 드나든다. 강 건너 철책이 있고 그 너머가 카자흐스탄이다. 가끔 국경초소가 보이고 군인들도 목격된다. 비자를 위해 오가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현지 경찰에 대한 말을 꺼내는데 웃음이 나온다. 아무리 추운 영하 25도 날씨에도 밖에서 근무한다. 그만큼 수입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경찰의 부정부패가 만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갑자기 사기로 화제를 바꾼다. 연예인 박상민과 컬투가 카자흐스탄에 투자했다가 사기당한 에피소드로 시작해 가수 구창모의 전설로 이어진다. 처음엔 중고차로 대박을 쳤으나 아파트건설로 망한 일화다.
현지인들은 틀에 박힌 한국식 아파트보다 개인맞춤형을 선호하고 천장이 높아야 하는데 이를 고려하지 못한 것이 실패요인이라고 말한다. 모든 것이 넘치면 모자람보다 못하다는 격언이 떠오른다.
종교얘기를 빼 놓을 수 없다. 매우 엄격해서 온건한 무슬림을 믿고 과격한 IS와 철저하게 격리된다. 서민생활은 월 2만원으로 물과 전기 그리고 난방이 해결된다니 풍족한 삶이다. 수력발전의 덕이고 남으면 수출까지 한단다.
현지이야기로 꽃을 피우다보니 2시간이 훌쩍 지난다. 잠시 휴게소에 들러 쉬어가기로 한다. 먼저 돈을 내는 화장실을 이용하고 휴게소를 들어서는데 신기하게 와이파이가 터진다. 틈을 타 카톡으로 가족 안부를 묻는다.
가이드가 ‘쌈쓰’라는 현지 간식을 제공한다. 빵에 고기를 넣고 튀긴 것으로 특이하다. 간식이라기보다 주식이라 해도 충분하다. 따스한 차와 함께 맛을 보는데 썩 괜찮다. 짜릿한 휴식을 즐기고 갈 길을 재촉한다.
버스가 출발하자 현지가이드 ‘루슬란’이 마이크를 잡는다. 조금 더 리얼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키르기스스탄은 7개주로 구성되어있다는 말을 시작으로 월급 150달러로 어떻게 살아가는지 설명한다.
사실 월급은 그저 용돈에 불과하고 집에서 키우는 소와 양을 팔아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적은 월급으로도 사는데 큰 문제가 없다고 강조한다. 그때 철로를 달리는 기차가 창밖으로 보인다.
하루에 한번만 물자수송을 위해 운행하는 열차라 보기 힘든데 본 것이다. 가이드는 이를 여행 온 분들이 착해서 행운을 잡은 것이라 비유한다. 남은 여행기간 동안에도 좋은 일만 생기리라 감히 예언한다.
재미난 열차 해프닝이 끝나자 가이드는 말을 계속한다. 오늘의 목적지인 ‘이식쿨’ 호수는 뜨거운 호수, 모레에 갈 ‘아라쿨’ 호수는 하얀 호수를 의미하는 말이라 소개한다. 현지어를 모르는 우리에게 하나의 팁이다.
돌연 혼인문화 이야기를 꺼낸다. 무슬림 전통으로 남자는 4명까지 부인을 둘 수 있다는 말이다. 다만 부인들에게 동일한 대우를 해야 하는 경제적인 부담으로 현실적으로 그리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한다.
키르기스스탄의 국기에 대한 해설로 화제를 바꾼다. 적색의 바탕은 피를 뜻하고 40개의 햇살은 40개의 민족을 의미하며 가운데 집모양은 ‘유르트’라는 유목민족의 천막 천정을 가리킨다. 참 거룩한 느낌이 든다.
한 가지 경제적인 안타까움을 토로하는데 기름은 나오나 정유시설이 없어 수입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대의 자원인 이식쿨 호수를 세세히 설명한다. 수심이 670미터, 폭이 67키로, 길이가 180키로 그 규모가 호수보다 바다다.
바다같이 염분이 있고 온천이 나와 추원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 현지인들은 그 물로 가글한다 하니 놀랍다. 그때 갑자기 버스가 속도를 늦춘다. 엄청난 사람들이 길을 점유하고 어디론가 무리지어 가고 있는 풍경이다.
저마다 무슬림을 나타내는 ‘깔빡’모자를 쓰고 있어 무슨 종교의식으로 짐작된다. 가이드가 장례행렬이라는 설명에 경의를 표한다. 아직도 매장문화를 지키고 있고 장례행력은 남자만이 참석하는 게 전통이란다.
이러저런 얘기로 시간은 흘러 점심때가 다가온다. ‘바칸바에바’라는 도시에 잠시 멈춰 현지식당으로 들어간다. 메뉴는 중국음식인 ‘라그만’과 러시아의 ‘베르맨’이다. 처음 보는 음식이라 호기심이 발동한다.
머리에 천을 두른 여인이 음식을 내온다. 중앙아시아 여인복장이 흥미롭다. 다소 쌀쌀한 날씨라 따스한 차를 마시며 김치를 곁들여 먹으니 먹을 만하다. 맵고 짠맛이 강해 빵을 찍어먹으니 환상의 조합이다.
특이한 점심을 하고 화장실을 향한다. 돈 내고 들어가는데 완전 재래식이라 냄새가 장난이 아니다. 힘들게 체험하고 나오는데 시장골목이 바로 옆이다. 그냥 둘러보러 갔다가 ‘깔빡’모자를 하나 300솜 주고 사서 쓴다.
진짜 양가죽으로 만든 것은 아니고 중국산으로 모조품이다. 그 모자를 쓴 내 모습이 이상한지 다들 쳐다본다. 잘 어울리고 마치 현지인 같다고 칭찬 일색이다. 지나가는 현지인도 재미있는 표정으로 눈짓한다.
버스는 다시 출발해 이야기 협곡이라는 ‘스카스카’ 협곡에 이른다. 가볍게 두 시간 트레킹 코스로 기이한 형상의 바위를 자랑하는 협곡이다. 입구에서 입장료를 내려는데 아무도 없다. 행운의 무료입장이다.
불그스름한 괴상한 모양의 바위와 능선이 이어지는 협곡트레킹을 시작한다. 마치 오징어 같은 바위들이 줄지어 서있는가 하면 뾰족한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듯 곧게 솟아있는 형상이 참으로 신기하다. 오랜 세월 풍화와 침식으로 자연이 연출한 걸작이다. 카메라도 담기엔 역부족이지만 열심히 찍어본다.
걷다보니 더워져 겉옷을 벗는다. 따스한 햇볕이 땀을 초대한다. 트레킹의 끝은 협곡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평평한 능선이다. 사방이 확 트여 호수까지 시원하게 보인다. 모두 탄성을 지르며 떠날 줄 모른다.
추억을 남기기 위해 기념촬영을 시도하는데 나는 ‘깔빡’ 모자 덕분에 앞줄 한가운데를 차지한다. 약간 겸연쩍지만 촬영에 응한다. 다들 잊지 못할 추억거리라며 아우성이다. 내가 모델인양 같이 찍자는 일행이 많아진다. 모자로 급조된 인기를 누리고 나오는데 내 모습을 현지인으로 기념하자는 박대장의 청에 포즈를 취한다. 멋진 사진이 되기를 바란다.
신나는 협곡트레킹을 마치고 나오는데 한쪽에서 웨딩촬영이 한창이다. 빨간 드레스의 신부와 턱시도 신랑이 환상적인 포즈를 취한다. 아름다운 협곡을 배경으로 찍는 기념촬영은 더 이상 좋을 수 없다.
버스로 돌아오면서 오늘은 참 좋은 날임을 천명한다. 보기 힘든 열차부터 시작해서 장례행렬을 목격하고 웨딩촬영까지 만나니 진정 행운이 깃든 날로 기억하고 싶다. 이 정도면 현지문화를 제대로 맛본 것이 아닌가?
그렇게 하루를 생각하면서 가이드와 같이 걷는다. 그런데 갑자기 가이드가 나의 직업을 물으면서 자기도 지압사로 일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날 운이 나빠 손의 동맥을 다쳐 그만두고 여기에 왔다고 한다. 어디서나 하고픈 일을 할 수 있다 그게 진정한 행복이라 일깨우며 꿈을 가지라 당부한다.
오후 4시에 트레킹을 마치고 버스는 '카라콜'로 향한다. 버스 안에 파리를 잡으며 ‘등에’라고 하는데 처음 듣는 말이다. 일종의 쇠파리인데 생소하다. 초등학교 시절에 다들 배웠다고 하는데 나만 모른다.
창밖은 평온한 시골풍경이 연속이다. 알마티 산맥과 천산산맥 사이로 하염없이 달린다. 이제 가이드도 힘는지 말수가 줄어든다. 잠시 멍 때리고 쉬다 보니 6시가 다가온다. 버스는 ‘타가이타이’ 호텔에 안착한다.
이른 아침부터 먼 길을 달려온 버스와 기사에게 고마움을 표하면서 호텔로 들어가 방을 배정받는다. 열악하나 참을 만하다. 짐을 정리하고 샤워하는데 따스한 물에 느낌이 너무 좋다. 쌓인 피로가 싹 가신다.
감사하다는 뜻의 현지어 ‘라흐맛’을 배우면서 자주 쓰기로 다짐한다. 저녁은 호텔 식당에서 하는데 마침 생신을 맞은 여성분이 계신다. 와인과 보드카를 내고 케이크와 캐비어도 준비해 푸짐한 만찬을 시작한다.
식당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요리가 나오는데 낮에 먹었던 현지식과 유사하지만 좀 고급스럽다. 뭔지 모르지만 소주와 먹으면 큰 문제없다. 주류파와 잔을 나누면서 분위기는 달아오르고 담소를 즐기며 취기가 돈다.
58년 개띠들은 다시 뭉쳐 있는 술을 마음껏 마시며 어제의 산행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이제 내일 가야 할 ‘알튼아라산’으로 관심이 모아지면서 즐거운 산행이 되기를 기원한다. 마지막까지 남은 술을 비우고 잠자리에 든다.
와이파이가 터지지만 속도가 아주 느려 카톡을 포기하고 꿈나라로 빠진다. 13일 아침이 밝는다. 6시에 일어나 태국을 여행 중인 아내와 카톡으로 교신하며 안부를 접한다. 싸늘한 날씨라 그런지 목감기 기운이 있다.
호텔에서 간단한 조식을 하고 짐을 꾸려 산장으로 갈 차비를 한다. 오늘은 대형 오프로드 트럭에 몸을 싣고 산장까지 가야한다. 가는 길이 순탄치 않아 아주 큰 타이어로 무장된 트럭이 아니면 갈 수 없다고 한다.
트럭에 짐을 차곡차곡 싣고 한사람씩 올라타 자리를 잡는다. 20인승 지프차가 꽉 찬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거대한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먼저 가까운 러시아정교 교회로 향한다. 가는 길에 그냥 들리는 것이다.
최고의 목조건축물인 교회건물을 둘러보고 안으로 들어가 초를 사서 불을 붙이고 기도를 청한다. 남은 여행기간 무탈하기를 바란다. 각자 기도 내용은 다르겠지만 목적은 같으리라 짐작된다.
트럭은 다시 산장으로 향한다. 포장도로가 끝나고 산길이 시작되니 롤링이 심하다. 가만히 앉아있기도 힘들다. 이런 돌길을 올라가는데 신기할 정도다. 좌우로 울창한 나무가 쓸리기도 하고 웅덩이에 덜컹 빠지기도 한다.
얼마나 힘을 줬는지 온몸이 경직된다. 한 시간여 올랐을까 휴식을 취한다. 파란하늘에 화창한 햇볕이 내려쬐는 가운데 사방에 뾰족한 침엽수가 자태를 자랑하고 빙하가 녹은 물이 쉼 없이 흘러내린다.
아무런 꾸밈없는 자연 그 자체를 감상하며 사진을 찍는다. 천국이 있으면 바로 여기가 아닐까 착각할 정도다. 한 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대자연의 연출이 아름답다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다. 상쾌 명쾌 통쾌 즉 삼쾌다.
달콤함 휴식을 마치고 다시 트럭에 오른다. 급격한 경사의 돌길을 오르는데 몸을 가눌 수 없다. 조금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차라리 걸어가는 게 나을 듯하다. 유럽인들은 걸어간다고 한다. 그 만큼 차로가기 힘든 길이다.
한 시간을 더 가니 광활한 평야가 나타나면서 또 하나의 장관이 연출된다. 해발 2,500미터 ‘알튼아라산’내에 들어온 것이다. 모두 트럭에 내려 사방을 감상한다. 하얀 설산과 파란 하늘 그리고 침엽수 환상적인 경관이다.
서로 사진을 찍어주면서 자연에 감사하며 탄성을 지른다. 달력그림이 따로 없을 정도로 평화로운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트럭은 먼저 가고 일행은 산장까지 걸어간다. 걸으며 둘러보는 산세는 감동 그 자체다.
눈만 돌리면 걸작에 버금가는 장관에 발걸음이 가볍다. 금새 산장에 도착해 배정된 방에 짐을 푼다. 8인용 방인데 네팔에서 경험해서 그런지 그리 불만스럽지 않다. 침낭을 깔면서 미리 잠자리를 챙긴다.
점심은 산장에서 준비하는데 ‘꾸르달’이란 양고기 요리다. 이는 삶은 감자와 버무린 요리로 현지에서 가장 많이 먹는 음식이다. 느끼한 맛을 줄이기 위해 반주와 김치를 곁들여 즐겁게 먹는다. 조금 질기지만 먹을 만하다.
점심이 끝날 무렵 박대장이 내일 산행에 대해 양해를 구한다. 여러 채널로 정보를 수집한 결과 눈이 많이 내리고 얼어서 당초 코스는 어렵고 B코스로 안내한다는 소식이다. 서운하지만 지켜보기로 한다.
식사 후 포만감을 느끼며 햇볕 쬐며 휴식한다. 가이드의 안내대로 온천을 하기로 한다. 산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허름한 온천탕으로 간다. 시설은 열악하지만 수질은 참 좋다. 유황기가 있어 미끄럽다.
충분한 시간을 갖고 즐기려 하는데 갑자기 외국여자가 노크한다.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데 홍콩에서 왔단다. 바로 옆 탕으로 옮겨 위기를 모면한다. 다만 내 짐이 거기에 있어 난감한데 나중에 가져오기로 한다.
마침 ‘루슬란’이란 가이드가 들어온다. 그에게 부탁해 짐을 가져오라고 부탁한다. 과감하게 짐을 꺼내 오는데 대단하다. 재미나고 스릴 있는 해프닝이다. 이젠 맘 놓고 온천을 즐긴다. 더우면 개천에 식히면서 온탕냉탕을 반복한다.
건선이라는 피부병으로 고생하는 나에게는 짱이다. 피곤도 풀지만 피부를 건강하게 한다. 남들이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오랜 시간 온천을 즐기고 산장으로 돌아온다.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날아갈 듯하다.
내 침낭에 고양이가 떡하니 있어 소스라쳐 쫓지만 끔쩍하지 않는다. 일행이 잡아서 내쫓는다. 한가한 자유시간이라 다들 여유가 있다. 갈증을 풀기위해주방으로 가니 가이드가 김치찌개를 끓이고 있다. 맛난 냄새가 진동한다.
맥주를 찾으니 기꺼이 내준다. 시원하게 한잔 하면서 잡담을 한다. 건선에 좋다는 화산흙도 알려주고 귀촌생활도 화제에 올린다. 다른 일행들도 오면서 이야기는 계속된다. 여자들의 온천시간 얘기가 단연 으뜸이다.
나는 다시 온천으로 달려가 재탕을 시도한다. 더욱 한적한 분위기에서 홀로 즐긴다. 잠시 후 근처 산행을 다녀온 일행이 들어온다. 반가운 마음에 어서 오라고 인사하며 온천을 즐긴다.
오후로 접어들면서 날씨가 다소 싸늘해진다. 재빨리 산장으로 달려가 옷을 갈아입고 식당에 있는 난로가로 간다. 여성 일행들이 벌써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주춤한다. 가이드가 주는 맥주를 마시며 저녁을 기다린다.
저녁은 특식이다. 양을 한 마리 잡아 국을 끓이면서 삶고 장작불에 꼬치로 굽기도 한다. 양고기 일절을 내올 모양이다. 게다가 가이드가 장시간 끓이는 김치찌개가 기대된다. ‘루슬란’이 몰래 부엌으로 데려가 양고기국물을 맛보라 권하는데 냄새는 모르겠고 진하지만 매우 짜다.
고대하던 만찬이 시작된다. 먼저 김치찌개를 맛보니 죽인다. 준비한 소주를 마시며 삶은 양고기를 씹는다. 조금 질기지만 색다른 맛이다. 일행 한분이 보드카를 찾는다. 가이드가 나가서 구해보지만 헛일이다.
꼬치로 구운 양고기가 나온다. 고소하고 맛있어 술안주로는 최고다. 소주를 비우고 가이드가 주는 맥주로 대신한다. 부족한 양이지만 내일 산행을 위해 절제한다. 끝날 무렵 박대장이 다시 내일 산행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의견을 수렴하여 당초 예정대로 ‘아라쿨패스’로 산행하기로 선언한다. 눈이 많이 내렸고 얼었지만 갈 수 있는 곳까지 시도하고 어려우면 돌아오는 걸로 양해를 구한다. 어려운 결정이지만 모두 존중하는 눈치다.
산행에 필요한 최소한 짐으로 배낭을 챙기고 내일 기상이 좋기를 기원하며 일찍 잠자리에 든다. 오늘밤도 따뜻한 물로 채운 주머니를 껴안은 채 침낭 속으로 들어간다. 따스한 온기가 퍼져 어떤 추위도 두렵지 않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선잠으로 14일이 밝는다. 새벽하늘의 총총한 별을 보며 쾌청한 날씨를 기대한다. 누룽지와 달걀 프라이로 간단하게 아침을 때우고 추위에 대비하여 완전무장을 하고 트레킹 준비를 마친다.
드디어 출발시간 5시 반이다. 인원점검을 마치고 출발한다. 트레킹을 하지 않는 분들은 산장에서 머물기로 한다. 산장을 나서 개울을 건너 숲길로 접어든다. 캄캄한 새벽에 오직 보이는 건 헤드랜턴 불빛행렬이다. 장관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앞만 보며 부지런히 걷는다. 어느새 몸에서 땀이 흐른다. 겉옷을 벗고 걸음으로 지속한다. 한 시간여 지났을까 여명이 밝아온다. 안개가 피어오르며 위엄 있는 산세를 연출한다.
한 번의 오름을 넘으니 주위가 푸른 초원으로 바뀐다. 푹신한 길을 내딛는 느낌이 너무 좋다. 더욱 힘을 내어 두 번째 오름을 넘는다. 내피까지 벗어 던질 정도로 더워진다. 여성 한분이 포기하고 가이드와 내려간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만 수긍하고 산행을 계속한다. 두시간정도 걷고 나서 준비한 간식으로 허기를 채운다. ‘아라콜패스’가 아스라이 보인다. 가이드가 패스에 눈발이 내리고 있어 상황이 어떨지 우려를 표명한다.
일단 가는 데까지 가기로 했으니 오름을 계속한다. 선두와 후미가 벌어지기 시작한다. 날씨는 점점 흐려져 잔뜩 찌푸리고 간간히 눈발이 날린다. 그래도 패스 근처까진 가야한다는 강한 의지로 버틴다.
오르고 또 오르는데 끝이 없다. 예상대로 눈길이 보이고 체력적으로 힘든 산행을 해야 한다. 아이젠을 찰 정도는 아니지만 수북이 쌓인 눈길을 오르니 체력소모가 크다. 눈발이 세지면서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선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른다. 뒤를 쫓아가는 일행은 과연 어디까지 갈 건가 궁금해진다. 사방은 하얗게 변하고 시계가 불투명하니 상황은 어렵다. 그때 박대장이 준엄한 판단을 내린다. 여기가 한계라며 하산을 결정한다.
아쉬운 마음에 하얀 눈밭에 벌렁 누워 인증 샷을 찍는다. 발길을 돌려 내려가면서 신이 허락하지 않는 이유를 곱씹는다. 다만 허락하지 않는 영역에는 들지 않는 것이 신선에 대한 깍듯한 예의임에 틀림없다.
시간은 10시반 하산이 시작되면서 눈은 더욱 굵어진다. 금방 함박눈으로 변하여 눈 산행이 따로 없다. 조급한 마음에 발길을 재촉한다. 눈으로 길이 없어져 분간하기도 힘들 정도다. 오를 때 분위기와 완전 다르다.
이젠 폭설로 이어져 하얀 세상이다. 크리스마스 나무에 내리는 눈이 마치 성탄절을 기념하듯 축복이 한 가득이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광경에 감동하면서 정상까지 오르지 못한 아련함을 대신한다.
함박눈을 맞으며 설경에 취해 걷다 보니 시간가는 줄 모른다. 거의 내려와 개울을 건너야 하는데 눈 쌓인 외나무다리가 미끄러워 매우 위험하다. 다른 안전한 통로를 찾아 간신히 건넌다. 10월에 제대로 눈을 체험한다.
산장이 가까워지면서 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갑자기 허기가 느껴져 양갱을 까먹다가 한눈팔아 자빠진다. 겸연쩍어 잠시 그냥 있는데 뒤따르는 일행이 몹시 걱정한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일어나 연기라 둘러댄다.
그럭저럭 산장에 이르니 1시반이다. 3시간이 걸렸는데 눈길에 빠른 편이다. 곧장 온천으로 달려가 몸을 담근다. 전신이 노곤해지면서 기분이 좋아진다. 눈발이 날리는 고즈넉한 분위기에서 온천을 즐기는 맛이 실낙원이다.
한참 온천을 즐기는데 박대장이 들어온다. 당초보다 일찍 3시에 출발한다고 전한다. 값진 온천을 체험하고 산장으로 돌아와 짐을 챙긴다. 부엌으로 가니 맥주를 하산주로 대접한다. 시원하게 원 샷으로 답례한다.
그렇게 퍼붓던 눈이 그치고 주위는 온통 설경으로 장관을 이룬다. 놓칠 수 없어 사진을 찍어보지만 내 눈만큼 멋있지 않다. 설경을 뒤로하고 모두 짐을 챙겨 대형오프로드 차량에 탑승하여 호텔로 향한다.
올 때 체험해서 그런지 익숙해진다. 비포장이 시작되자 온몸이 요동친다. 조금 가더니 모두 내리라 한다. 급한 경사에서 회전할 때 위험하니 걸어가야 한단다. 색다른 경험이다. 어느 정도 걷다가 다시 탑승하여 내려간다.
비포장이 끝나고 시내에 들어서자 차는 속도를 낸다. 눈이 왔지만 길은 다 녹아 운행에는 문제없다. 이미 묵었던 ‘타가이타이’ 호텔을 5시에 도착한다. 마치 정든 집을 다시 찾는 야릇한 기분이다.
재빨리 방에 올라가 젖은 옷가지와 짐을 널고 샤워한다. 1박 2일의 산행을 마무리하는 순간이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7시에 호텔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한다. 어김없이 소주와 보드카로 반주한다. 끝으로 맥주로 입가심하고 취해 잠에 빠진다. 이른 새벽 산행부터 만찬까지 참으로 긴 하루였다.
깊은 잠을 자고 깨니 새벽 5시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아 밝은 어둡다. 어제 못한 소식을 카톡으로 가족과 친구에게 전송한다. 이른 시간이라 와이파이가 잘 터져 다행이다. 그런데 피곤했던지 입이 터진다. 워낙 건조한 기후다.
오늘 15일은 ‘촐폰아타’로 가서 이식쿨호수를 구경하는 일정이다. 호텔에서 조식하고 느긋하게 9시에 출발한다. ‘바이’를 뜻하는 ‘작시바랑스’ 현지어를 배워 해본다. 매우 흥미롭다는 반응이다.
날씨는 쾌청하여 시계가 뚜렷하다. 오랫동안 추억에 남을 산행전후에 묵은 호텔을 떠난다. 시내를 벗어나자 눈 내린 설산풍경은 환상적으로 다가온다. 앞은 알마티산맥 뒤는 천산산맥 모두 하얀 설경을 뽐낸다.
이런 풍경은 일 년에 며칠 없다는데 정말 운이 좋은 편이다. 보고 또 봐도 지겹지 않은 평화스런 장면이다. 도저히 참다못해 어느 지점에 차를 세운다. 소와 말이 거닐고 양들이 노는 풀밭으로 들어가 설경을 만끽한다.
마침 말을 타고 다가오는 맘씨 좋은 할아버지와 함께 사진도 찍는다. 일행모두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은지 떠날 줄 모른다. 어제 정상을 허락하지 않으신 신령께서 착한 일행을 위해 최고의 설경을 선물하는 셈이다.
아무리 쳐다봐도 질리지 않는 장관을 뒤로 하고 가던 길을 계속한다. 버스 안에서 삼삼오오 수다가 시작된다. 그 중 오지 산행을 마약에 비유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결국 산행은 중독성이 있다는 말이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버스는 잔잔한 속도로 달린다. 왼쪽에 이식쿨호수의 지평선이 보이고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천산산맥의 파노라마가 그림을 연출한다. 카메라로 찍지만 원하는 만큼 묘사되지 않는다. 애써 가슴에 남기려 노력한다.
가이드가 갑자기 왼쪽을 보라고 한다. 바로 여기가 카자흐스탄 대통령별장이란다. 호수를 볼 수 있는 최고의 위치를 자랑한다. 조금 더 지나니 작년에 개최된 세계유목민축제장이 나타난다. 한국도 활쏘기로 참가했다고 한다.
잠시 후 버스는 ‘르호르도’ 체험관에 멈춘다. 현지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한 관광지다. 입구에서 어느 현지인이 천안에서 오신 분 있냐고 외친다. 한국에 있을 때 천안에서 살았다고 한다. 마침 천안에서 오신 분이 있어 반가운 인사를 나눈다. 한국의 힘이 느껴진다.
체험관으로 들어서니 한국에서 기증한 종이 눈에 들어온다. 한국의 소리라 쓰여 있다. 괜히 마음이 뿌듯해진다. 더 안으로 들어가니 현지 유명작가의 동상이 보이고 다양한 조각도 전시되어 있다.
하나씩 둘러보고 사진도 찍으며 유유자적 둘러본다. 제일 경치가 좋은 지점으로 다가간다. 파란 하늘, 하얀 구름, 잔잔한 호수가 어우러진 백만불짜리 장관을 말없이 바라보며 행복에 젖는다. 아내와 같이 있다면 하는 바람이다.
스마트폰의 파노라마 기능을 활용해 고스란히 담아본다. 이 장면만큼은 꼭 보여주리라 마음먹는다. 말로 전하다 부족하면 보여줄 요량이다. 체험관에 마련되어 있는 몇몇 전시관을 둘러보고 빠져나온다.
인근 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한다. 아주 유명한 ‘우르바까’ 식당으로 여름엔 자리가 없다고 한다. 메뉴는 이미 먹어본 ‘라그만’과 ‘샤슬릭’이다. 벌써 익숙해져서 거리낌이 없다. 양고기 꼬치인 ‘샤슬릭’이 여태까지 먹은 것 중 가장 맛있다. 시원한 생맥주를 곁들여 배터지게 양고기를 즐긴다.
내 인생 양고기를 가장 맛나게 먹고 호수 유람선을 탄다. 우리 일행만으로 배를 띄워 호수를 한 바퀴 돈다. 과자로 갈매기를 꾀며 유람을 시작한다. 무료함을 달래려 맥주를 마시며 노래도 해본다. 현지 가이드 ‘루슬란’이 온갖 재주와 끼를 선보이면서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흥겨운 친구다.
다른 일행들은 뱃머리에서 타이타닉 포즈를 취하면서 사진을 찍고 미소를 띤다. 넘실넘실 파도치는 호수를 바라보며 나름대로 독특한 장면을 기록에 남기려 애쓰는 분도 있다. 비록 짧지만 흥미로운 뱃놀이다.
재미난 유람을 마치고 바위에 암각화가 새겨있는 유적지로 향한다. 산양과 눈 표범을 비롯해 다양한 동물을 새긴 바위가 곳곳에 있다. 마치 숨은 그림 찾기처럼 암각화를 찾아 나선다. 그림이 많이 훼손되어 안타깝다.
이제 버스는 숙소를 향해 치닫는다. 고급 리조트인 ‘라두가’ 이식쿨리조트에 도착해서 짐을 푼다. 주위에 자작나무와 은행나무가 잔뜩 단풍이 들어 가을 청취를 물씬 풍긴다. 한적한 리조트 분위기가 너무 맘에 든다.
해는 벌써 서서히 지고 있어 일몰을 보기위에 옷을 갈아입고 호수로 달려간다. 석양에 비친 호수가 일품이다. 맨발로 호수로 들어가 물을 적셔본다. 시원하다 못해 차다. 물에 들어가기에는 다소 쌀쌀한 날씨다.
호수를 보다 가까이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로 다가가 해지는 장관을 바라보면서 이 나라가 이식쿨 호수를 왜 자랑하는지 알 듯하다. 이렇게 훌륭한 자연유산이 너무 부럽고 길이길이 보존되었으면 바란다.
날씨가 점점 쌀쌀해져 방으로 돌아온다. 샤워를 하고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는다. 기본적으로 볶음밥을 주고 뷔페식으로 갖다 먹는 방식이다. 마지막 소주를 끝내고 모자라 맥주를 주문해 마시며 식사를 즐긴다.
식사를 마칠 즈음 어느 일행이 맥주를 추가로 구입해 방에 가서 마시자고 제안한다. 거절하기 뭐해 못 이긴 척 따라간다. 일행 중 제일 나이가 많으신 어르신 방에 마련된 자리에서 맥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눈다. 어르신 말씀을 경청하며 기쁨조 역할을 기꺼이 해낸다.
자리를 파하고 밖으로 나오니 보름달이 훤히 떠있다. 은은한 달빛을 머금은 단풍잎이 제법이다. 여행의 마지막 밤을 달래주는 듯 달마저 쓸쓸하다. 내일이면 서울로 돌아가는데 왠지 아쉬움이 더해 간다.
감기기운이 있어 약을 먹고 일찍 잠을 청한다. 땀을 흘리며 단잠을 잔다. 새벽에 잠이 깨져 카톡으로 소식을 전하며 일출을 기다린다. 6시 무렵 밖이 훤하게 밝아와 두툼한 옷을 챙겨 입고 호수로 나선다.
이미 몇몇 사람들이 나와 일출을 기다린다. 아무도 없는 전망대에서 녹음한 색소폰 연주를 감상하며 떠오르는 해를 바라본다. 아주 맑은 날은 아니지만 구름을 살며시 비집고 나오는 해가 오히려 찬란하고 화려하다.
그 때 일행 한분이 다가와 사진을 부탁해서 찍어준다. 같이 연주를 들으며 일출을 보면서 조용한 아침을 맞는다. 정상에서 맞는 일출과는 다른 느낌이 든다. 매우 뜻 깊은 순간으로 기억될 것 같다.
일행과 함께 돌아오는 길에 예쁜 청솔모를 만나 사진을 찍고 방으로 간다. 그 순간 열쇠가 없음을 깨닫고 일행에게 묻는다. 나도 모르게 길에 떨어뜨린 열쇠를 다행 일행이 주워 가지고 있다. 커피든 뭐든 대접해야 할 일이다.
16일 오늘은 비슈케크로 돌아가는 날이다. 호텔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짐을 챙겨 버스에 오른다. 9시에 출발해 호수를 끼고 달리는데 천산산맥의 위용은 여전히 계속된다. 언제까지 따라오려는지 궁금하다.
두 시간여 달려 올 때 들린 그 휴게소에 잠시 세운다. 틈새를 이용해 카톡으로 가족과 교신한다. 아내는 이미 관광을 마치고 돌아온 상태다. 충분한 휴식을 당부하고 내일 보기로 한다. 뭐니 뭐니 해도 반가운 소식이다.
버스는 다시 부지런히 달려 아리랑 식당에 이른다. 이미 12시가 훌쩍 넘어 점심을 먹을 때다. 미리 주문한 청국장이 나온다. 모처럼 맞는 한국식이라 반찬도 맛있다. 과감하게 소주를 한 병 시킨다. 7달러로 비싸지만 먹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한다. 반주로 포만감을 느낀 점심이다.
이제 비행기를 탈 때까지 남은 시간을 보내려 버스는 광장으로 간다. 마침 주일이라 가축시장도 열리고 웨딩차도 보인다. 국경은 매우 번잡한 분위기고 시내부근에 컨테이너 시장도 인파로 북적거린다. 사람 사는 세상이다.
광장에 도착하자 한쪽에서 파는 꿀을 맛보며 쇼핑을 한다. 여기서 가이드의 여친 ‘아이잔’이 도와준다. 예쁘장한 그녀와 결혼 할 가이드 이 부장은 수지맞은 듯하다. 큰 나이 차를 사랑으로 극복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일행은 인근 ‘사이마’ 백화점으로 자리를 옮겨 못 다한 쇼핑을 한다. 나는 립크림을 사서 터진 입술에 바른다. 조금 나아진 기분이다. 각자 기념품을 구입하고 나온다. 역시 쇼핑은 여성에겐 필수 아이템이다.
다시 건너편 재래시장에 몰려간다. 없는 게 없는 전통시장으로 인간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방금 구운 빵을 하나 사서 맛보며 나눠준다. 배가 부른데도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나오는 길에 커피도 한잔 사서 마신다.
에매한 시간에 비행기를 타기에 간식이 준비된다. 올 때 들른 서울식당으로 가서 따뜻한 메밀국수를 먹는다. 하루 종일 먹는 날이다. 식당을 나오는데 여행사에서 기념으로 꿀 한통을 준다. 고맙게 받아들고 공항으로 향한다.
오후 5시 공항에 도착하여 수속하고 가이드와 작별한다. 늘 그랬지만 정든 가이드와 헤어짐이 짠하다. 여자 친구와 결혼이 하루 빨리 성사되길 바라며 여행후기를 보내기로 약조한다. 즐거운 추억을 빠짐없이 적어서 말이다.
예정대로 타슈켄트에 7시에 도착해 환승절차를 밟는다. 올 때 환승과 마찬가지로 수속직원이 허우적댄다.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지 무척 더디다. 참고 기다리는 방법 외엔 없다. 간신히 수속과 보안검색을 마친다.
비행기에 탑승하자 조금 후 식사가 제공된다. 와인을 주문해 배불리 먹고 바로 잠에 빠진다. 잠깐 잤을까 도착 멘트가 나온다. 아침 7시반 인천공항에 무사히 도착한다. 긴 여정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포근하다.
이번 여행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는다. 수차례 해외산행을 다녀왔지만 이런 기분은 처음이다. 더 높고 더 좋은 곳을 찾는 산행이 즐겁지 않을 리 없지만 기대했던 만큼 만족되지 않는다. 한계가 있기 마련인가보다.
산행도 마약과 같다는 말에 동감한다. 중독되어 아무리 좋은 곳에 갈지라도 느끼는 감은 줄어든다. 어디에 갔다는 실적산행이 되고 보여주기 위한 산행으로 빠진다. 네팔을 수없이 갔다는 고수로부터 한수 배운다. 어디를 가느냐보다 무엇을 위해 가느냐를 고민하면서 자중하기로 한다.
평점 4.0점 / 5점 일정4 가이드4 이동수단4 숙박4 식사4
정보
작성자 우*열
작성일 2018.10.29

안녕하세요. 키르기스스탄 상품이 막 처음 탄생했을때 이야기를 솔직하게 담아주셔서 매우 흥미있게

글을 읽었습니다.

 

상품은 2015년에 처음 답사를 해서 16년도에 출시를 했습니다.

 

일정이 많이 변하고 다채로워 졌지만 초창기 일정이 더욱 흥미로웠던 것 같습니다.

 

작성해주신 한글자 한글자 소중하게 기억하고

 

추후 선보일 일정에 잘 녹여내도록 하겠습니다.

 

늦은 상품평이지만 소중한 의견 잘 새겨듣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품평 이벤트 적립드리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