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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혜초인도기행1] 오색찬란,북인도 9일(KE)
작성일 2019.04.12
작성자 조*훈
상품/지역
문화역사탐방인도/네팔/스리랑카
오 ~ 인디아 !

50여년에 걸쳐 직업상으로나 개인적 목적으로 외국에 살거나 여행해 왔으나 인도를 찾을 기회가 없었다. 모처럼 계기가 무르익어 아내와 더불어 영상으로만 보던 타지마할의 땅 북인도로 향했다.

우선 기행문의 본문을 시작하려고 하니 이 다양하고 복잡한 역사에 관한 최소한의 가늠자가 없이는 이번 여행의 의미가 쉽게 정리되기 어려울 것 같아 장구한 인도의 역사를 위키피디아를 통해 검색해 본다. 고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와 더불어 인더스강 유역은 세계 3대 문명발상지로서 광범위하고 인구가 밀집해 살던 지역도 많았으며, 오늘날의 푼잡 라자스탄 우타르프라데쉬 카시미르 등 북인도와 파키스탄 등지를 포함한다. 많은 학자들은 인더스강 유역이 드라비디아(Dravidian) 문화권으로서 오늘날 남인도문화의 연원이 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한다. 기원전 2600-1900에 절정을 이루었던 인도와 아프간, 이란 등지의 인더스문명으로 일컫는 집단적 정착 사회는 기원전 1700년경부터는 기상변화로 인한 수자원 부족으로 급격하게 쇠퇴하게 된다.

이어서 농경보다 유목민적인 소 양육에 주력하면서 인도-아리안 종족들의 북서부로부터 인도아대륙(印度 亞大陸, Indian subcontinent)을 향한 이주가 개시되었다.(인도의 인종은 2018년 현재 인도-아리안계가 72%, 드라비디아계가 25%, 몽고 기타가 3%로, 북부 및 북동부에 상당수 몽고계가 살고 있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이어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600까지 북서부 인도에서 서부 간지스강 평원으로 이주하며, 고대 힌두교 브라민교(Brahmins)의 경전인 베다(Vedas)에 뿌리를 두고 베다문화가 번성하게 된다. 기원전 5세기부터 인더스문명 이후 간지스강 유역에 제2의 정착시대(Second urbanisation)가 열리며, 생과 사의 윤회설이나 온건적 또는 극단적 금욕사상에 기초를 둔 불교와 자인교(Jainism)도 이 시기에 발원하게 된다. (이번 여행 첫 일정이 바라나시의 간지스강 방문이었으며, 간지스강 연안에서 그 오랜 세월 삶이 이어온 모습을 그려 보았다.) 이 시기 고대 인도에는 특히 아프간과 파키스탄 지역으로 부터 간지스강 유역과 중부 인도 그리고 동부 벵갈만에 걸쳐 16개 왕국과 일부 공화체제 그리고 작은 왕국들이 흥망을 거듭했다. 기원전 530년 페르샤의 아키메니드왕조(Achaemenid Empire) 사이러스 대제에 이어 기원전 520년 다리우스1세가 오늘날의 아프간과 파키스탄 지역에 침입하여 2세기에 걸친 페르샤 지배가 계속되었다. 기원전 327년 알렉산더 대제에 의해 페르샤 지배가 종료되었으나, 인도 북부 푼잡지역까지 진군한 알렉산더 대제는 난다왕조(Nanda Empire)의 대군과 맞서게 되자 내부 반란으로 결전을 포기하고 후퇴한다.

난다 왕조에 이어 등장한 기원전 322-185년간의 모리야 왕조(Maurya Empire)는 인도아대륙 히말라야로부터 동부로 아쌈까지, 서부로는 아프간까지 인도아대륙에서 가장 광범위한 영역을 통일하게 되었으며, 왕조 말기의 아쇼카왕(Ashoka)은 전쟁의 참화를 회피하고 불교의 보급에 진력하며 반세기에 걸친 평화시대를 펼쳤다.(불교유적 관람 일정으로 아쇼카왕 시절의 유적, 유물도 볼 수 있었다.) 한편 인도아대륙 남부에는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4세기에 걸쳐 3 왕조가 지배하는 상암시대( Sangam period)를 거치게 되고, 모리야 왕조로부터 6세기의 굽타왕조의 종료에 이르기까지 인도역사의 이른바 고전 시대(Classical period)가 열린다. 320-550년간은 굽타제국(Gupta Empire) 시절로서 힌두문화로 알려진 과학 기술 예술 수학 천문 종교 철학의 발흥으로 힌두역사의 황금기를 이룬다. 이 시기 인도 경제는 세계경제의 3분의 1 로 부터 4분의 1에 이르러 세계에서 가장 컷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굽타왕조는 권력의 정당성을 베다사상(Vedic sacrifices)에서 찾았으나 동시에 브라만교의 정통성에 대한 대안으로서 불교도 후원하였다. 굽타왕조 이후 기원 650-1200년간 중세인도시대가 도래하게 되었고, 이 시기에 지역별로 수많은 왕조들이 출몰하였다.

8세기 초부터 이슬람 세력들은 오늘날의 아프간과 파키스탄지역을 정복하였으며, 인더스강 동편의 힌두왕국들은 아랍세력의 더 이상의 전진을 견제하고 있었다. 이 시대에 10세기 초까지 Gurjara-Pratiharas, Rashtrakutas, Palas 등 왕국이 있었다. 특히 북서부의 Gurjara-Pratiharas 왕조는 아랍의 인더스강 이동으로의 진출을 막는데 크게 기여했다. (Gurjara-Pratiharas 왕조 하의 영주였던 Chandelas 왕이 건축한 사원들이 우리가 3. 17 Khajuraho에서 보았던 서부사원그룹이다.) 북부와 서부인도를 통제하던 라즈퍼트왕조(Rajput dynasties)는 아랍 모슬렘들의 팽창을 막는데 성공하였으나 북부인도 심장부를 모슬렘 터키에 내어주는 사태에까지 이르렀고, 1192년 델리 북방 약 150km 인근에 있었던 제2차 타레인전투(The Second Battle of Tarain)에서 라즈퍼트 군대가 패배함으로써 인도 중심부에 모슬렘 통치의 본거지를 제공하게 되었다. 이어 중앙아시아 출신의 터키인들은 힌두를 물리치고 델리술탄국(Delhi Sultanate)을 수립하였으며, 북부와 중부인도를 병합하고, 남부인도도 조공국으로 통제하였다. 델리술탄국의 통치하에서는 많은 사원이 파괴되었지만 인도와 이슬람문명의 융합으로 인도아대륙이 떠오르는 국제 네트워크에 통합되게 되었고, 몽골의 침략도 막아내는데 성공하였다. 몽골의 침투를 막아냄으로써 인도는 서부와 중앙 아시아의 경우와 같은 파멸을 피할 수 있었으며, 수세기에 걸쳐 몽골로부터 도피한 군인, 학자, 무역인, 예술인, 기능인들이 도래하여 인도-이슬람 문화의 창달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1398년 12월 17일 터키-몽골계의 정복자 티무르(Timur)가 델리를 공격하여 모슬렘을 제외하고는 3일 밤낮에 걸쳐 철저히 살육하고 파괴하며 약탈하였다. 하루에 10만명을 살상한 것으로 알려졌다. 티무르의 약탈 이후 델리술탄국은 분열의 길에 들어 섰으며, 인도아대륙이 여러 왕국 하에 분할 통치되면서 결국 1526년 터키-몽골계의 수니 모슬렘왕조인 티무리드(Timurid)의 후예 바브르(Babur)가 수립한 무갈제국의 지배 하에 들어간다. 무갈제국의 전성기에는 남아시아의 대부분까지 그 통치 하에 있었으며, 특히 제3대 아크바르대제를 비롯한 무갈제왕들은 자신들의 터키-페르시아 문화를 고대인도 스타일과 융합시켜 힌두교도와의 우호관계를 도모하였다. 아크바르대제 자신이 힌두교 계열인 라즈퍼트왕조의 공주와 결혼 함으로써 후계 제왕들이 라즈퍼트와 혼합된 혈통을 가지게 되었다. 제5대 샤 자한(Shah Jahan) 시대는 무갈건축의 전성기로서 이번 여행의 하일라이트인 유명한 타지마할도 이 때 건축되었다. 제6대 오랑젭대제(Aurangzeb)는 선대 제왕들보다 덜 관용적인 정책을 시행하여 힌두교도와 시크교도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모슬렘이 아닌 많은 지도자들을 처형하였고, 무갈제국의 쇠퇴의 길을 재촉하게 되었다. 인도아대륙 내의 다른 왕국인 마라타(Maratha Empire), 바라트푸르국(Bharatpur State), 아프간, 이란왕 등 공격으로 패퇴를 거듭하다 결국 1857년 영국 동인도회사에 고용된 군인들에 의한 인도반란(The Indian Rebellion) 이후 영국에 의해 병합되었다.

영국은 동인도회사에 의한 통치를 빅토리아여왕이 인도의 여왕을 겸하는 왕정(The Crown)에 의한 통치로 변경하고 1858-1947년간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버마, 스리랑카 지역에 이른바 영국식 통치(British Raj) 하에 직접 통치하거나 일부 자치를 인정하였다. 영국은 1905년 행정적 목적으로 벵갈지방을 모슬렘지역인 동부벵갈 및 아쌈과 힌두지역인 서부벵갈로 분리 통치하였으나 벵갈지역에 토지를 소유한 힌두교도들은 명백한 devide and rule 정책이라 하면서 반발하였다. 파키스탄 지역에 관해서는 무하마드 알리 지나(Muhammad Ali Jinnah)에 의한 모슬렘 분리주의 운동의 영향하에 1947년 6월 인도 Congress Party의 네루(Nehru)와 모슬렘 연맹의 지나가 간디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종교적기준에 따른 분리독립에 합의한다. 살아있는 세대에 대한 인종청소로 미래 세대가 태어나는 것 자체를 방지한다는 극단적인 전대미문의 엄청난 폭동이 휩쓸었다. 임산부의 배를 째고 태아를 깨내버리거나 영유아를 무참히 살해해 버리는 만행이 자행되었다 한다. 난민이 넘쳐나는 가운데 1947년 분리 전 3억9000만의 인도는 3억3천만의 인도와 3천만의 서부 파키스탄 그리고 3천만의 동부 파키스탄(현재 방글라데시)로 분리되었다.

3.14 목 뉴델리 공항에 내리니 기온은 아직 그다지 덥지 않았고 기대보다 편안한 주변이었다. 비교적 현대적인 공항의 모습을 갖추고 공항의 요원들로부터도 프로페셔널의 면모를 엿볼수 있었으며 승객들도 부담스럽지 않은 매너로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공항 밖 시내로 진입하며 덜거덕거리는 도로 포장상태나 러쉬아우어의 트래픽잼 하며 스모그로 버거운 공기상태도 그러려니 하면서 숙소를 향했다. 호텔에서 저녁식사도 카레 향이 도처에 서려 있었지만 그런대로 무난히 소화할 수 있었다. 마침 아내의 생일을 맞이하게 되었으나 식당 내에서는 미리 면세점에서 사가지고 온 샴페인을 마실 수 없다해서 호텔 방으로 돌아와 처형내외와 조촐하면서도 즐거운 축하행사를 가졌다.

뉴델리호텔에서 하루밤을 지낸후 3.15 금 이른 아침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우리 여행의 첫 목적지인 셈인 바르나스(Varnasi)에 도착하였다. 비행기가 기상관계로 1시간 반 가까이 연발했으나 프로그램이 여유롭게 짜여져 다행이었다.

먼저 인근 부처의 유적을 찾았다. 부처님 석가모니는 오늘날은 룸비니라 불리는 네팔 땅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부처가 깨달음을 얻기위해 북인도지역을 여행하다가 여기 베르나스 교외 약 13km 떨어진 사르나스(Sarnath)에서 깨달음을 얻고 제자들도 만나고 최초의 설법도 하게 되었다한다. 우리는 먼저 부처님이 다섯 제자들과의 만남을 기념하기 위한 탑을 찾았다. 원래 건조된 탑이 몇 차례 보수를 거쳐 오늘의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소박한 자태로 불자의 겸손과 순응을 상징하는 듯 싶었다. 이어 약 1킬로미터 거리의 녹야원(鹿野苑)을 찾았다. 커다란 정원 한쪽에는 사슴을 사육하고 있었다. 정원에는 500년 경에 건축된 부처의 활동에 관한 기념탑(Dhamek Stupa)이 웅장한 자태로 다가왔다. 당초 기원전 249년에 아쇼카왕이 세운 것을 다시 개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후 다섯 명의 브라민 제자들에게 첫 설법을 하신 장소를 기념하기 위한 곳이라고 한다. 역시 바라보며 명상하기 좋은 디자인으로 소박하면서도 육중한 분위기를 안겨주고 있었다. 주위에 아쇼카 왕 시절의 여러 불자들이 명상한 장소와 무덤의 유적이 있었으며 아쇼카왕 시절의 건축물 유물도 전시되어 있었다. 동남아의 여러 불교신도들이 성지순례에 온 듯 여러군데에서 염불하며 행진하거나 앉아서 탑을 향하여 기도하고 있었다.

오후늦게 호텔에서 간지스강을 향하면서 그리고 돌아오면서 각 1시간 가까이 릭셔투어는 인도의 오늘을 물씬 느끼게 하는 인상깊은 시간이 되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허름한 3,4층 규모의 지저분하고 낡거나 달동네 모습의 거리를 따라 찻집앞에, 힌두교 기도원 언저리에, 줄이은 잡화점 언저리에 어슬렁거리는 길거리 소들과 개, 염소들, 오토바이, 자전거, 삼륜차, 버스, 트럭 그리고 그 사이사이 인파가 클랙슨소리, 힌두교 경전 노랫소리, 장사치의 외침, 거지들의 구걸로 얽힌 소음들 그리고 매연과 먼지로 무언가 뒤범벅이 된 거대한 시장바닥 같은것을 떠올리게 하면서 부산히 또는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일행의 색다른 행색에도 불구하고 소매치기나 공격적 움직임을 듣거나 볼수없고 그저 삼륜차 서비스나 나름대로의 무언가를 사달라는 부녀자 아동들 그리고 걸인들로 구성된 군중이 시간의 일부가 되어 흘러가고 있었다. 10여년전 읽은 일본의 수학자 후지와라 마사히코 교수가 쓴 “국가의 품격 이라는 평론서에 인도의 길거리를 묘사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마드라스에 가서 1시간 정도 산보할 계획으로 길을 나섰으나 자동차, 자전거, 릭셔 등이 소, 개, 염소 등과 엉켜 움직이는 가운데 무덥고 냄새나고 지저분하고 소란스러워 견디지 못하고 인도 출신 수학 천재의 고향을 방문하려던 당초 목적을 접고 바로 일본으로 돌아가 버린다.

인도인들이 강가(Ganga)로 부르는 간지스강은 히말라야 산맥에서 발원하여 인도 동부를 거쳐 방글라데쉬의 벵갈만으로 흘러가는 장장 2,525킬로미터의 큰 강으로서 인도인들의 삶과 문화에 있어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특히 우리가 찾은 바르나스는 인도 힌두교도들이 성지(聖地)로 중시하는 마음의 고향으로서 늙어서 바르나스에 와 살다 죽을 때 간지스 강가에서 화장된 후 뿌려지기를 희망하는 곳이라 한다. 강변에 도착하자 역시 강물에 어울어진 힌두교사원들과 건물들 언저리로 기도소리와 젊은 세대의 음악소리가 소란스럽게 섞여 퍼지며 관광객들의 주의를 끌고 있었다. 저녁 노을이 저물어가면서 조각배에 몸을 실고 우선 강변 한쪽에 위치한 화장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10여 군데에서 시신이 화장되고 있는 모습이 눈앞에 선한 가운데 강위의 조각배에 있는 수 많은 관광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사진 촬영을 삼가하라기도 하고, 소원을 빌면서 조그만 촛불을 강물에 띠워내려보내기도 하면서 숙연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죽음에 관한 깊은 생각이 복잡하게 스치는 가운데 우리의 조각배는 어느새 큰 인파로 기도소리가 요란한 힌두교 사원쪽으로 뱃머리를 돌리고 있었다. 바르나스 관광안내 책자나 광고판에 등장하는 힌두교 사원 주위의 붉으스레하게 퇴색된 강변 주위의 건물들과 힌두교 기도 소리와 음악소리, 군중의 소음이 얽힌 장면을 강위에 떠 있는 조각배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에 무언가 후빌듯한 조금 요란한 기도소리가 간지스강 물결과 대기에 묘하게 어울리면서 여기 바르나스에 서식해온 긴 세월의 삶과 죽음이 연상되고 있었다. 배에서 내려 힌두교사원 쪽으로 접근해 본다. 엄청난 인파 속을 헤치고 기도 준비하는 곳으로 접근해 보았다. 내용을 알 수 없는 힌두교 의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여러 장식이 바람에 펄럭이는 가운데 기도하는 신도들이 다양한 복장과 자세로 행사장 주위에 밀집해 있고 군데 군데 완전히 나체로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가이드한테 무엇하는 사람들인지 물으니 문화의 일부란다.

토요일 3. 16 첫 프로그램은 간지스 강변을 다시 찾아 일출을 즐기는 프로그램이다. 새벽 거리 풍경은 어제 저녁의 소란으로부터 해방감을 느낄 수 있으려니 했으나 색다른 양태로 다시 웅성거리는 숨가쁜 거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5:15에 호텔을 나섰으나 길거리에는 그 자리에서 간밤을 지샌듯한 사람도 상당수로 보였고, 힌두교 사원에서 기도하거나 간지스강에 목욕하기위해 나온 사람들도 많다 한다. 어제의 소음이 조금 약화된 모양새지만 다시 그 소란스러우면서 무질서하고 무언가 외치는 듯한 울림을 안겨주면서 이 190만(통계는 4백만까지도 있음.) 도시의 틀에 박힌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노젓는 조각배를 타고 강변 맞은 편 모래사장 위에 올라 해 뜨기를 기다린다. 인적은 많지 않았으나 청소년 몇 그룹이 서성이고 현지인 청년들이 조랑말을 끌고 타라거나 우리가 사진 찍는데 와서 기웃거린다. 드디어 서서히 해가 떠오른다. 사실 어디나 일출은 비슷한 모양인데 해가 빠른 속도로 떠오를 때 사람들은 해 모양의 장엄함이 온 누리를 비추는 과정을 느끼며 또 하나의 하루에 대한 상쾌한 기대감을 즐기는 것 같다. 이를 위해 새벽 잠도 기꺼이 포기하고 이렇게 발걸음도 가볍게 모두 달려온 것이겠지 생각해 본다. 간지스강의 새로운 하루도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오전에 어제 남겨놓은 일정으로 사르나트에 다시 가서 박물관을 잠시 관람하였다. 불교 유물과 힌두교 유물이 나뉘어 전시된 조그만 박물관이었다. 아쇼카왕시절 건물 기둥을 장식하던 바퀴모형이 전시되어 있었다. 인도 화폐에 바퀴모형 디자인이 여기서 출원된 것이라 한다. 힌두교 인물 석상들은 대부분 코 부분이 손상된 형태였으며, 모슬렘들이 모든 힌두교 유물을 파괴할 수 없으므로 코 부분을 부순 경우가 많다고 한다. 종교 갈등이 독특한 형태로 유물들에게 나타났다고나 할까?

힌두교도들의 성지(聖地) 바르나시를 뒤로하고 국내선 항공편으로 다음 기착지인 카주라호(Khajuraho)를 향한다. 유명한 고적 사원들이 즐비한 탓에 인구 6천명(통계에 따라 24,000까지)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공항을 건설할 수 있었다 한다. 첫 프로그램으로 자인교(Jainism) 사원을 방문하였다. 자인교는 처음 듣는 독특한 종교였다. 인도인구의 0.4%이니까 5,600,000이 신봉하며,비폭력, 다면성, 비집착, 금욕주의를 표방한다. 승려들은 모두 나체로 생활하며, 채식만 하고 심지어 그릇도 안 쓰며 손으로만 음식을 섭취한다고 한다. 사원 내 색다른 구조나 조형물은 보지 못했으나 전시된 사진에 나신의 승려들을 볼 수 있었다. 바라나스 힌두교 사원에서 눈에 띈 나체들이 생각났다. 인도가 종교의 나라라는 말이 새삼 와 닿았다. 저녁 때 쯤 호텔에서 40분 정도 요가 강습시간이 있었다. 요기 한 분이 정통요가를 차근차근 가르쳐 주었으며, 따라가기가 간단치 않았으나 온 몸이 긴장과 이완을 거듭하는 가운데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일요일 3. 17에는 Khajuraho의 유명한 사원들을 구경하는 날이다. 앞서 언급한 Gurjara-Pratiharas 왕조는 8세기 중엽에 시작하였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지방 영주들이 강력해졌으며, 그 중에 특히 Chandelas 왕조가 970-1030년 간 북인도의 Nagara 스타일과 에로틱한 조각들로 유명한 이 지역의 사원들을 건축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사원 중에 힌두교의 시바신(Shiva) 사원 6, 비쉬누신(Vishnu) 8, 가네샤신(Ganesha) 1, 태양신(Sun) 1 이고, 자인교(Jain) 사원이 3 이라 한다. 또한 13세기에서 18세기까지 모슬렘 왕들이 일부 파괴하거나 폐허로 방치하여 많은 손상을 입었다고 한다. 사원의 조각들은 기본적으로 힌두교의 가치체계를 반영하고 인간생활의 다양한 모습을 표현하고 있으며, 약 10%의 사원조각들이 에로틱한 조각들로 유명해졌다. 사원의 설계나 조각물들이 모두 특히 힌두교의 심오한 내용을 상징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천년전에 이렇게 대단한 건물들을 짖고 정교한 조각들로 장식한 것이 감탄스러운 일이었다. 적나라한 성적인 장면이 두드러지지 않고 일생 생활에 관한 이미지와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어 안내를 받아야 찾아 볼 수 있는 정도라는 점도 지적되고 있다. 힌두교의 교리와 관련이 있는 조각들이지만 세속적으로는 당시 전쟁이 빈발하는 상황에서 싸움에 나갈 젊은 사람이 적어지므로 아이들을 많이 낳도록 권장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도 그럴듯 했다. 사원들의 구조나 조각들은 사원마다 큰 차이는 없어보였으며, 우리는 두 세 사원을 돌아 본 후 차량으로 약 4시간 거리 오르차(Orchha)로 향하였다.

오르차까지의 도로 사정은 별로였다. 도로포장도, 도로표지도 애매한 길이 이어지고 끝 없이 나타나는 인도의 촌락들과 시골 시장거리를 통과하며 여러 종류의 차량과 여러 종류의 동물과 여러 종류의 사람 사이로 곡예하듯 우리 버스는 달리고 있었다. 교통사정에 비추어 볼 때 별로 교통사고가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거리나 방향감각이 뛰어난 사람들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오르차는 16세기에 건설된 도시로서 라자 마할(Raja Mahal), 자항기르 마할(Jahangir Mahal) 등 무갈 건축 양식의 유서 깊은 유적이 많은 곳이나 시간 관계로 간단히 관람을 마치고 점심을 한 후 아그라 행 기차가 출발하는 잔시(Jhansi)역으로 향하였다. 기차길 선로에 소가 서성거리고 역무원이 뒤쫓는 진풍경도 보였지만, 기차는 시속 70km 정도로 별 불편 없이 2시간 40분 걸려 아그라에 도착하였다.

제5일 3. 18 드디어 아그라의 유명한 타지마할을 관람하는 날이다. 아침 일찍 타지마할에 연접한 정원으로 해 뜨는 모습을 보러 나갔다. 동이 트며 아이보리 화이트(ivory-white) 색의 대리석에 빛나는 타지마할의 아름다운 자태가 서서히 나타나는 모습이 일품이었다. 우리도 관광객들과 섞여 흥분된 표정으로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었다.

호텔에 돌아 와 아침을 마치고 우리는 아그라 교외의 Sikandra에 위치한 제3대 아크바르대제의 능을 산보하였다. 아들 Jahangir제왕이 1605-13년간 건축한 것으로 타지마할에 약 30년 앞선 능이며, 1681년 당시 Aurangzeb왕의 압제에 반기를 든 Raja Ram Jat 일파에 의해 능 내부의 많은 보물이 약탈되었다 한다.

오후에 타지마할의 경내에 들어가 본격적 관광을 시작하였다.

제5대 샤 자한 제왕이 페르샤 출신 왕비 뭄타즈 마할(Mumtaz Mahal)이 14번째 아기를 출산하다가 사망하자 그녀를 위한 능으로서 1632년에 기공하여 1643년에 완공되었으며, 부수 공사가 다시 10년 동안 더 계속되었다고 한다. 년간 7-8백만 관광객이 방문하고, 2007년에 세계7대불가사의(The New7Wonders of the World)의 하나로 선정되었다. 타지마할의 명성에 비추어 사실관계를 위키피디아를 통하여 조금 더 알아본다.

> 페르샤와 초기 무갈건축 양식으로서 사마르칸드(Samarkand, 현 우즈베키스탄 중동부)의 티무르 무덤인 Gur-e Amir, 델리 소재 할아버지 후마윤의 무덤 등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관찰되며, 초기 무갈 건물들이 붉은 색의 사암(sandstone)을 많이 썼으나 보석들로 장식된 흰색 대리석을 사용함.
> 대부분의 무갈 능처럼 페르샤식을 따르고 있으며, 건물의 모든 부면이 정확한 대칭적 구조를 이루고 있음. 본관 윗방에 뭄타즈 마할과 샤 자한의 가묘가 있고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 낮은 층에 실제 무덤이 있음.
> 가장 멋 있는 것은 무덤을 위에서 바치고 있는 돔으로서 높이가 35미터이고 생긴 모양 때문에 양파 돔(onion dome)이라고도 불리움. 꼭대기(finial)는 페르샤 및 힌두스탄 장식과 연꽃 무늬로 되어있으며 이슬람 모티브로서 양쪽 꼭지 부분이 하늘을 향한 초승달 모형도 걸려있음. 당초 꼭대기(finial)가 금으로 되어 있었으나 19세기에 도금한 동으로 대체됨. 지붕위에 네개의 작은 돔 외에 장식용 첨탑이 있으며 특히 작은 돔의 열린 공간을 통하여 무덤 내부에 햇빛이 비추도록 설계되어 있음. 무덤을 돌아보며 우리는 실제 햇빛이 들어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음.
> 4개의 미나렛(minarets)은 각 40미터 높이고, 본 건물처럼 대칭으로 지어졌으며, 유사시 무덤부분이 손상되지 않도록 약간 바같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점이 신기했음.
> 외부 장식도 무갈 건축 중에 가장 뛰어난 것으로서 인간의 모형을 금지하는 이슬람 전통에 따라 주로 글씨(calligraphy), 추상형태, 식물모티브로 구성되어 있으며, 쿼란(Qur’an)의 귀절이 광범위하게 새겨져 있었음. 대문의 글씨로서 영어로 번역된 부분은 다음과 같음. "O Soul, thou art at rest. Return to the Lord at peace with Him, and He at peace with you."
> 내부 장식도 전통적 장식보다 정교하며, 팔각형으로 된 내실은 포도, 과일, 꽃을 포함한 여러가지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음. 무덤 자체에 정교한 장식을 금하는 모슬렘 전통에 따라 뭄타즈와 샤 자한의 유해는 묘의 기초부분에 있는 보석 장식 외에는 비교적 수수하게 머리부분이 메카(Mecca)를 향한채 안치되어 있다함. 샤 자한의 묘와 비석이 뭄타즈의 묘와 비석보다 좀 큰 것이 전체 건물 디자인에서 유일하게 비대칭적이라고 함. 윗방의 두 가묘도 크기가 다르게 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음.
> 정원은 전형적 무갈식 정원으로서 가운데 동산과 샘 그리고 네 강 사이로 동서남북에 걸쳐 펼쳐있는 이슬람 천국의 정원을 모형으로 한 것이라고 함. 다만 영국 통치 하에서 영국 식으로 정원 모양이 변형됨.
> 타즈마할 측면을 향하여 두 개의 붉은 사암으로 지은 건물 중 서편은 모스크로, 이와 대칭으로 동편은 게스트하우스로 쓰였던 것으로 보이는 건물이 있음.
> 건축자재는 온 인도와 아시아로부터 도입되었으며, 투명한 흰색 대리석은 인도의 Makrana, Rajasthan에서, 벽옥(jasper)은 푼잡에서, 옥과 수정은 중국에서, 기타 티벳, 아프간, 스리랑카, 아라비아 등지에서 터키석, 청금석(lapis lazuli), 사파이어, 홍옥수(carnellian) 등이 도입되었음. 도합 28 타입의 보석 또는 보석 유사품이 흰색 대리석에 장식되었음. 22,000명 이상의 노동자, 석공, 예능인이 일했으며, 수송에 1000 마리 이상의 코끼리가 동원되었다함.
> 타지마할이 완공되자 아들 Aurangzeb이 재정이 파탄날 것을 우려하여 샤 자한을 퇴위시키고 죽은 후 부인 곁에 안치함.
> 샤 자한이 건축에 참여한 건축가나 공예가등이 다른 유사한 건설공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손발을 절단하였다거나 처형했다는 소문이 있으나 증거는 없음.
> 17세기 말 당시 Aurangzeb왕의 압제에 반기를 든 Jat 일파가 아그라와 타지마할을 공격했으며 샹들리에와 금은장식이 약탈됨.
> 2000년에 인도 최고법원은 힌두 왕이 타지마할을 건설하였다는 청원을 기각하였음.

타지마할은 내부의 구조나 장식이 아주 아름답고 멋있게 되어 있어 경내 모든 부분이 우리의 시선을 끌었다. 주제는 역시 샤 자한과 뭄타즈의 사랑에 관한 것인데 사랑이 이렇게 어마어마한 구조물로 표현된 인류 역사가 흔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더더욱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전체적인 전경도 가까이서 보거나 멀리서 보거나 한결같이 강렬한 인상을 안겨주어 오랫동안 그 이미지가 우리 기억에 남아있을 듯했다. 네루대학에서 연마한 한국어를 구성지게 구사하며 우리를 안내한 인도인 가이드도 세상사람이 타지마할을 본 사람과 보지못한 사람으로 구별된다고 말한다. 좀 더 알아보니 이 표현은 사실은 1896년 Mark Twain이 3개월에 걸쳐 인도를 방문했을 때 사용한 것으로 그럴듯한 울림이 다가왔다. ?

“The world is split into two parts, those that have seen the Taj Mahal and those who have not. ?

“ …I saw it in the daytime, I saw it in the moonlight, I saw it near at hand, I saw it from a distance; and I knew all the time, that of its kind it was the wonder of the world, with no competitor now and no possible future competitor . . . ?


오후에 이어서 우리는 아그라성(Agra Fort)을 찾았다. 초기 무갈제국의 제왕들이 통치했던 궁으로서 제2대 후마윤제왕도 1530년 여기서 즉위하였다 한다. 샤 자한이 아들인 Aurangzeb왕에 의해 퇴위된 후 아그라 성 내 멀리 타지마할이 보이는 구역에서 연금상태로 지냈다고한다. 샤 자한이 타지마할이 보이는 대리석 발코니가 있는 탑에서 죽었다는 소문도 전래되고 있다. 정확히 그 지점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도 타지마할이 멀리 잘 보이는 지점에서 샤 자한의 심정을 상상하고 있었다. 성은 38만 평방미터의 500여 빌딩으로 구성된 방대한 규모이며 외적으로부터 방위하기 위한 여러 설계가 설명되고 있었다. 아그라성은 17세기 말 Jat 일파가 13년간 점령한 일도 있고, 18세기 초에 Maratha 제국이 점령하는 등 수난을 거듭하다가 1803년 영국의 관할로 넘어갔으며 1857년 인도반란 시 전투의 현장이었다.

저녁에 우리는 타지마할이 잘 보이는 건물 옥상에 자리를 잡고 석양 빛에 곱게 물들어가는 타자마할의 예쁜 돔을 바라보며 맥주 한 잔을 즐겼다.

제6일째 3. 19 화에는 아그라의 멋있는호텔 Jaypee Palace를 뒤로하고 뉴델리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큰 도시인 Jaipur를 향해 출발하였다. 가는 길에 악크바르대제 시절 잠시 무갈제국의 수도였던 Fatehpur Sikri 의 또하나의 옛궁전을 보았다. 물 공급문제로 지은지 4년만에 다른 곳으로 궁전을 옮겼다 하며, 전형적인 무갈제국형 왕실로 접견실, 특별실, 생활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외교교섭용으로 내부공간에 X자형 구름다리를 놓고 교차지점에 교섭테이블과 의자를 두도록 특수설계한 건물, 왕비의 종교를 감안해 힌두교를 믿는 부인의 기도실을 5층 꼭대기 하늘에 가까이 설치한것이라든지 기독교를 믿는 왕비용 건물을 따로 둔 것등이 독특했다.

버스가 Jaipur에 가까워짐에 따라 점점 4차선 도로도 뻗어 있고 아직도 소들이 거닐고 낙타가 함께 다니지만 거리가 조금 정돈된 모양세다.

Jaipur는 현재는 파키스탄과 접경한 북부 인도 Rajasthan 주의 주도다. 번왕국(藩王國)이라 번역하는 Princely State로서 11세기 Dhundhar 왕국으로 출범한 이래 1947년 인도로 통합되기 까지 존속한 힌두교도의 독특한 지역이다. 14세기에서 1727년 Jaipur state로 바뀌기 까지 Amber 왕국이 계속되었으며, Amber의 Bharmal Kachwaha왕은 자신의 딸을 아크바르대왕에게 시집보내면서 무갈제국과의 우호관계를 도모하였다. 결과적으로 무갈제국과의 관계를 적절히 관리함으로써 Amber왕국은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Jai Singh II(Sawai Jai Singh)왕은 1699-1744년간 제위하였으며, 방위에 우선 순위를 두고 Amber성에서 11km 떨어진 Jaipur에 신 수도를 건설한다. 무갈제국의 보호막이 취약해짐에 따라 1818년 영국 보호령으로 편입되기 까지 Jats of Bharatpur, Alwar, Marathas 등과의 전란이 계속되었다. 1876년 영국 황태자 방문시 그를 환영하기 위해서 온 주요건물을 분홍색으로 색칠함으로써 “Pink City 라는 별칭도 얻었다.

시내 왕실유적으로 우선 천문시설인 Jantar Mantar를 관람하였다. 19개 기구로 구성되어 있으며 해시계, 월식일식 계기, 별 기타 천체 관측시설로서 Jai Singh왕이 1734년에 완공한 것이라 한다. 마침 해가 비치고 있어 간단한 수식으로 계산하니 해시계가 당시의 정확한 시간을 가르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5층 건물 정도는 될듯 싶은 것으로부터 단층 집체 만한 다양한 규모의 해시계들과 천체와 별자리의 모형들이 즐비하게 설치되어 망원경을 사용하기 이전에 당시 Jaipur의 과학발전에 관한 관심과 발전 수준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러한 천체에 관한 기술이 힌두교 경전 Vedas가 시간과 달력을 언급하고 인도의 여러 고전에서 관측장비에 관한 기술이 있다하니 대단한 일이라 생각했다. 우리나라에서도 해시계 등 모형을 본일이 있지만 비교가 안될 정도로 큰 규모였다.

왕실의 옛 건물들은 Maharaja Sawai Man Sing II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미술공예품, 의상, 무기 등이 건물 별로 전시되어 있었다. 베일을 쓴 왕실 여인들이 번화한 시장거리를 내어다볼 수 있도록 지은 Hawa Mahal은 1799년 완공된 것으로 벌집모양의 창이 달린 5층의 분홍빛 건물이다. 우리에게는 건물을 지은 목적이나 색갈이나 구조가 상상 이상이었다.

제7일째 3. 20 수요일에는 Jaipur의 산상에 위치한 아메르성을 찾았다. 난생 처음 거대한 코끼리등에 타고 조약돌로 포장한 오르막을 코끼리의 뒤뚱거리는 발걸음에 따라 몸을 서툴게 움찔거리며 약 15분 거리 산 중턱의 아메르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메르성에 오르내리는 길에는 엄청난 수의 잡상인들이 결사적으로 달라붙어 처절한 삶의 현장을 볼 수 있었다. 아메르성은 25년간이나 건축하여 1599년 완공되었다. 접견공간, 특별실, 생활공간으로 나뉘어 무갈 왕실 양식과 기본구조가 유사하나 화려한 힌두교 문양과 장식이 돋보였다. 아메르성 핵심부를 방위하기 위해 주변 산 능선 전체에 Jaigarh Fort라는 거대한 방벽을 설치하고 대포제조창까지 마련한 완벽한 방위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실제 커다란 대포가 한 대 전시되어 있는데 한 번만 발사되고 그 뒤 실제 사용된 일은 없다 한다. Amber 왕실이 특히 무갈왕에 대한 외교에 능했다 하나 한편으로는 안보에도 각별한 대비를 하였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제 이번 여정의 마지막 날 3. 21 수 가 되었다. 뉴델리의 명소를 찾을 차례이나, 마침 인도의 봄맞이축제로서 공휴일이 되어 원래 예정되었던 국립박물관 이나 간디기념관이 휴관 중이라 관람할 수가 없었다. 시내를 드라이브하며 대통령궁, 국회의사당, 총리 관저, India Gate, 외교단지 등이 몰려있는 중심가를 차창으로 넘겨다 보았다. 뉴델리 중심부는 영국이 1911 수도를 캘커타에서 이 곳으로 옮기면서 도시계획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비교적 여유와 균형이 잡힌 도심의 모습이었다. 과학과 종교의 화합을 표방하는 Bahai종교의 연꽃 사원(Lotus Temple)을 방문하였다. 흰 대리석으로 지은 27개의 연꽃 잎 모형의 외관으로서 시드니 오페라 건물이 연꽃 반 송이를 형상화 했다면 여기는 연꽃 한 송이의 모형으로 독특한 설계가 돋보였다. 원래 이란과 중동지역에서 기원하여 현재는 이스라엘 Haifa에 본거지를 둔 종교나, 화합이라는 표방에도 불구하고 인도에는 종교로서 믿는 자는 많지 않고 관광객이 주로 찾는다 한다.

이어 무갈제국 제2대 제왕 Humayun의 능을 산보하였다. 페르샤 양식으로 중앙룸에 후마윤의 묘소가 있고 주변 방들과 외부 부지에 그 가족들 묘지가 군데군데 산재하고 있었다. 후마윤의 첫 부인 Bega Begum의 주도로 후마윤의 사후 9년째인 1565년에 시공하여 1572년에 완공하였다 한다. Bega Begum이 선정한 북아프간 출신 페르샤 건축가 Mirak Mirza Ghiyas가 설계하였으나 기본구조가 완성되기 전에 사망하여 그의 아들 Sayyed Muhammad ibn Mirak Ghihathuddin이 완공하였다 한다. 1857년 인도반란(Indian Rebellion)시 영국이 무갈의 마지막 제왕 Bahadur Shah Zafar 을 추방하고, 후마윤 묘역도 접수함에 따라 정원의 디자인이 변화를 거듭하고 한 때는 배추와 담배까지 재배하였으며, 1947년 인도분할 시는 신생 파키스탄으로 이주하기 위한 모슬렘들의 수용소로도 사용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 1993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후 Aga Khan 재단(The Aga Khan Trust)의 지원으로 복원노력이 진행되어 왔다. 규모가 좀 작고 대리석이 적게 쓰였으나 기본 설계에 있어 Taj Mahal을 지은 샤 자안왕이 할아버지인 후마윤의 묘지를 모델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후마윤 묘역 구내에 위치한 아프간 귀족 Isa Khan의 묘소가 후마윤 묘지보다 20년전에 건축되었으며, 팔각형의 아름다운 돔건물이 이목을 끌었다. 이 건물의 특색도 상당 부분 후마윤 묘소에 반영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마지막 일정으로 Qutub Minar 탑을 방문하였다. 높이 73m로서 델리술탄국의 창시자 Qutb-ud-Din Aibak이 힌두교도들과의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192년에 건설을 시작하여 후계자인 사위 Shamsuddin Iltutmish가 1220년에 완공하였다. 수 차례 지진이나 벼락으로 부분적으로 손상되었으나 복원공사가 있었다. 아프간의 Jam 미나랫을 표본으로 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5층 구조이나 3층 까지는 붉은 색의 사암으로 4층은 대리석으로, 제일 위의 5층은 사암과 대리석으로 되어있고, 내외벽에 쿼란의 인용문이나 장식들이 각인되어 있다. 이 탑은 실제로는 타지마할의 꼭지부분보다 약간 낮지만 인도아대륙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한다. 일행 중 한 분이 바벨탑은 어디에 있는지 질문을 던진다. 검색해 보니 바벨탑은 성경 창세기에 나오며 여러 전설이 있고 실제 탑도 세계 도처에 있지만 대표적인 것은 바빌론에 기원전 6세기에 세워진 91m 높이의 탑이며, 알렉산더 대왕이 더 높게 짓겠다고 무너트렸으나 자신이 죽어 새 탑을 세우지 못했다 한다.

실제 가까이서 올려다 본 이 탑은 대단한 위용(偉容)의 자태로 바라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기상을 느낄 정도였다. 중간 중간에 자연재해가 있었다고 하지만 이 80% 힌두교의 나라에서 그 긴 세월을 이 탑이 온전히 보전되어온 곡절이 신비롭기만 했다.

7박의 여정으로 북인도를 여행한 감회가 엄청 무겁게 밀려왔다. 떠 나기전 예상치 못한 벅찬 삶의 이야기가 이 땅에 서려 있었다. 사람들은 다른 온 세상을 다 보는 것보다 더 인도 땅을 보고자 할 것이라는 마크퉤인의 말을 다시 인용해 본다. “…the one land that all men desire to see, and having seen once, by even a glimpse, would not give that glimpse for the shows of all the rest of the world combined.

이렇게 며칠 동안 여행으로는 풀리지 않는 수 없는 의문도 떠 올랐다. 무언가 오래 오래 생각할 필요가 있을 듯 싶어 떠 오르는 감상들을 우선 요약해 본다.

힌두교라는 것은 어떤 종교일까? 인도아대륙은 힌두교, 불교, 자인교 그리고 시크교의 세계 4대 종교의 발원지이며, 2011년 통계로 인구비 신자수는 힌두교 79.8%, 이슬람 14.2%, 기독교 2.3%, 시크교 1.7%, 불교 0.7%, 자인교 0.4 %로 나온다. 어찌 보면오늘날 인도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상당부분 힌두교의 영향을 받고 있을 것으로 추정해 보기도 한다. 힌두교 경전인 Vedas의 내용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으나 빅뱅을 포함하는 우주 만물의 원리와 인간세계의 카스트제도까지 논거를 제공하는 것으로 언뜻 이해되었다. 인도 사람들로서 수학이나 과학의 천재가 많다 하는데 이러한 종교적 배경이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일까? 초반부에 언급한 후지와라 교수는 결국 몇년이 지나 다시 마음을?굳게?먹고?인도를 방문하여 천재의 고향을 찾아간다. 거기서 천재가 나올 만한 주변 환경 특히?사원들의?숨막힐?정도의?아름다운?풍경과 신에게?복종하는?마음의?자세로서?종교적, 정신적 여건을 확인하고 있다.

인도는 왜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이 많을까? 인도의 1인당 GDP는 2018년 현재 2,134 미 달러로 세계 122번째이며, 하루에 1.90 미 달러로 사는 극빈층(extreme poverty)이 2018년 현재 7천60만명이다. 최근 수년 동안 6-7%의 성장에 성공하고 있다지만여행 도중에 도처에서 빈곤의 그림자를 느낄 수 있었다. 힌두교나 불교나 시크교나 자인교 모두 부자되는 것과 관계가 없는 다른 세상에서 사람들이 삶의 보람을 느끼도록 하는 종교일까? 아니면 수천년에 걸친 이슬람과의 충돌을 감내하며 살면서 부의 축적을 하기 어려운 불가피한 여건이 멍에가 된 것일까? 이른바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도가 이러한 극빈 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날이 가까운 장래에 올 수 있을까? 종교와 계급구조, 역사의 침전물이 너무도 강력한 여건하에서 신자유주의의 눈물이 되지나 않을까?

인도의 카스트제도는 경제가 성장되어감에 따라 점진적으로 해소될 것인가? 힌두교 교리에 따른 브라민을 정점으로 하는 계급제도는 출생을 기준으로 하며, 음식과 사회적교류가 분리되어 있고, 직업도 다르며, 다른 계급과 결혼도 금지되어 인도 사회의 발전을 짓누르고 있는 것으로 비판되고 있다. 원래 촌락에서의 생활 방식이었으나 영국의 식민통치가 카스트제도의 상당부분을 인정함으로써 더 고질화 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법적으로는 문제가 안되어도 실제 개인생활에 엄연한 족쇄를 제공하고 있으며 예컨대 요즈음도 자손이 다른 계급 사람과 결혼하면 그 부모는 고향에서 계급이 없어지고 집안 행사에 초청이 단절된다고 한다. 일부 젊은 층을 중심으로 다른 계급과 결혼도 하고 사회생활에서의 편견이 완화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수천년 전통이, 그 것도 힌두교라는 종교적 배경을 가진 인습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개선될 수 있을지?

힌두교도를 중심으로 한 현 인도라는 나라는 천년이상 이슬람과의 지속적인 마찰과 간헐적인 화합이라는 복잡한 역사의 산물이다.
무갈제국은 어찌 보면 중국의 청나라가 한족을 지배한 것처럼, 문화의 융합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모슬렘으로서 힌두교도들을 수백년 지배 하였다. 2차 대전 후에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가 분리 독립 함으로써 그 갈등을 어느 정도 완화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아직도 파키스탄과의 긴장관계가 계속되고 인도 내부에서도 힌디-모슬렘 충돌이 빈발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 모디 정부가 힌두교 정치세력에 강한 유대를 가지고 역사 재평가를 내세우며 간디-네루-간디로 이어진 제2차대전 이후의 역사를 비판하고, 파키스탄과의 통합을 주창했던 파텔(Sardar Patel)의 입장을 내세우는 것도 인도아대륙의 장래와 관련한 새로운 지평을 시사하는 것일까?

어찌보면 인도의 힌두교도들은 무갈제국의 역사와 영국식민지 통치를 거치면서 정치적 역량을 쌓을 기회를 박탈 당했다고 볼 수도 있으리라. 영국이 심어논 민주주의 토양이나 인도의 민주주의가 중국정도로 백성의 삶을 개선하는데 얼마나 실효적일 것인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인도적 특색이 있는 모종의 정치체제가 태동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의 상황에서는 일종의 환상에 불과하리라.
다만 긍정적 요인으로서 고령화에 시달리는 중국, 일본, 한국 등에 비하여 인도의 젊은 인구(2017현재 24세 이하 약 45%)가 향후 수십년간 상당한 자산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정치가 조직화의 기술이라고 볼 때 인도의 정치가 젊은 대중의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조직화하는 날을 기대해 본다.

며칠이나마 엄청난 혼돈 속에 소용돌이의 역사를 탐방하면서 무언가 의식에 맴도는 갈증 같은 것이 있다. 이렇게 패키지로 짜여진 프로그램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정신에 관한 깊은 경지가 그 땅에 스며들어 있을 것 같다. 언젠가 다시 기회가 오면 인도의 다른 지역에도 가보고 싶다. 인도의 문화에 깊숙한 영험이 있는 인사들과의 대화도 뜻있을 것 같다. 젊은 시절 읽었던 SommerMaugham의 The Razor’s Edge라는 소설에서 주인공 Larry의 인도 여행이 언뜻 생각났다. 기억을 위해 인터넷을 통하여 다시 줄거리를 회상해 본다. 1차 대전 참전 후 전쟁의 참상을 몸으로 겪고 방황을 거듭하던 주인공 Larry는 인도에서 힌두교 거루(guru)와 수도하면서 이른바 깨달음을 얻게 된다. Maugham 자신이 인도 여행중에 힌두교 승려로 부터 들은 표현이지만 소설에서도 Larry는 거루로 부터 “침묵도 대화다.(Silence is also conversation.) 라는 말을 듣곤 한다. Larry는 나름대로 인생의 의미를 찾게 되고 마음의 평정을 회복하게 된다. Larry의 깨달음으로 파리에 돌아간 후 그가 처한 사랑이나 가족에 관한 이야기가 새로운 전개를 보였는지 애매하지만 그 때까지 그가 지니고 있었던 가치에서 해방되어 자신이 발견한 희열의 순간을 아래와 같이 표현하고 있다.

"How grand the sight was that was displayed before me?as the day broke in its splendour...I was ravished with the beauty of the world. I'd never known such exaltation and such a transcendent joy. I had a strange sensation, a tingling that arose in my feet and traveled up to my head, and I felt as though I were suddenly released from my body and as pure spirit partook of a loveliness I had never conceived. I had a sense that a knowledge more than human possessed me, so that everything that had been confused was clear and everything that had perplexed me was explained. I was so happy that it was pain and I struggled to release myself from it, for I felt that if it lasted a moment longer I should die; and yet it was such rapture that I was ready to die rather than forego it. How can I tell you what I felt? No words can tell the ecstasy of my bliss. When I came to myself I was exhausted and trembling"




(끝)




2019.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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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작성자 박*하
작성일 2019.04.12

안녕하세요, 혜초여행 박윤하 대리입니다.

혜초여행과 함께한 북인도 여정에 만족해주시고, 성심성의껏 상품평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편의 책과 같은 기행문을 읽으니, 패키지 여행을 하셨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랍니다.

비록 글로만 고객님의 여행후기를 접하지만, 여정 중 고객님의 마음, 표정, 상념 등이 어떘을지, 어떻게 한 발 한 발 내딛고 보고 느끼셨는지, 문득 떠올려봅니다.

앞으로도 혜초여행에 관심을 가져주시고, 어느 곳에서도 항상 배움이 있는 여정되시길 바라겠습니다.

감사의 뜻으로 혜초포인트 10,000점 적립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