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뜨거운 여름시즌에 접어들면서 정신없이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하루를 마치고 늦게 서야 집으로 귀가했다. 그리고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다. 몸살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온몸이 아프고 열도 높았다. 원래 약을 잘 먹지 않는 편이고, 몸살이 나도 으레 2~3일 앓고 나면 괜찮아지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냥 조금 참으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출근하고도 계속 고통스러워 일찍 귀가했다. 그러나 주기적으로 죽을듯한 고통이 반복되고 고열과 함께 오한도 심해졌다. 한 밤에 물을 마시려고 일어났지만 걸을 수가 없었다. 온 몸이 샤워를 한 듯 땀이 흥건했다.

겨우 아침에서야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집 근처의 의원을 찾았지만, 의사는 큰 병원에 가라고 권했다. 그래도 그냥 버티기 작전으로 집에 누워 있었지만 점점 더 심해지는 고열과 오한 그리고 더욱 심한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집에서 가까운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으로 갔다. 진통제만 맞고 오래전부터 앓아온 역류성 식도염 때문에 그런 것 같다고 의사와 얘기하고 별다른 진단 없이 다시 귀가했다.

그리고 그날 밤 다시 40도를 웃도는 고열과 오한으로 견딜 수 없어 다시 응급실로 가야만 했다. 하지만 응급실은 초만원이어서 접수조차 할 수가 없었고, 몸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워졌다. 언제나 침착한 아내마저 다급한 마음에 어쩔 줄을 모른다. 할 수없이 언제나 도움을 주시는 신 박사님에게 전화를 했다.

놀란 신 박사님과 통화를 끝내자마자 응급실 저쪽에서 의사들이 내 이름을 부르며 찾는 소리가 들렸다. 영화에서 보던 피난민 수용소가 연상되는 응급실은 많은 환자들로 남는 침상도 없었다. 겨우 간이 의자를 하나 구해 통로에 앉히더니 각종 검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다른 의사 선생님이 올 때 마다 앵무새처럼 그간의 상태를 똑 같이 얘기해야만 했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계속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응급실의 풍경이 우리 사회를 축소판으로 압축해서 무대에 올려놓은 연극 같아 흥미로웠다.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응급 환자들, 환자와 함께 따라온 가족의 표정이 환자 이상이다. 119 구급대의 차에 실려와 계속 술주정하는 사람, 울어대는 간난 아기와 함께 진땀을 빼는 젊은 부부와 젊은 의사, 그리고 원더우먼 처럼 보이는 간호사... 이러한 피난민 수용소의 풍경은 아침까지 계속 되더니 한순간 조용해 졌다.

오전 8시경 고시 합격자 발표가 시작되었다. 응급실의 환자들이 얼추 100명이 넘는 것 같은데, 병실로 옮겨져 입원치료 받는 사람은 병실 부족으로 하루에 10명이 채 안된단다. 입원한 환자가 치료를 마치고 퇴원해야만 하고, 입원할 환자는 넘치며, 입원이라는 것이 기다리면 되는 것이 아니고, 환자의 위중이 우선이다 보니 조용히 입원 합격 발표를 기다릴 뿐이다.

어떤 환자는 며칠째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지만 언제 합격 될지는 모른단다. 드디어 합격자 발표가 시작되었다. 첫 합격자는 응급실에 가장 나중에 오신 귀태가 흐르는 할머니였다. 주변의 보호자 역시 사회의 상위 그룹이라는 것이 한눈에 보인다. 그리고 두 번째 합격자는 자랑스럽게(?) 바로 나였다. 모든 환자들의 부러움과 눈총을 받으며 신박사의 파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여러 가지 고통스러운 검사를 마치고 최종 병명은 말라리아, 역류성 식도염 그리고 급성 담도염으로 치료와 더불어 쓸개 제거 수술까지 꼼짝없이 두 달간 입원해야만 했다. 하지만 덕분에 여행인들 사이에서 진정한 여행인으로 높게 평가되는 말라리아 계급장은 달게 되었다. 아마도 그동안의 잦은 출장, 회사일로 심신이 지친데다 거의 매일 저녁 술자리에 빠지지 않는 등 몸을 너무 돌보지 않아 체력이 너무 약해져서 면역력이 떨어진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7월 초에서 8월 말까지 최고의 여행 성수기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원 없이 쉴 수 있었다.
지금까지 달려온 삶을 생각했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지인들의 걱정과 보살핌에 마음 깊이 감사했다. 항상 혜초를 위해 맘을 써주시는 신 박사님께도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하지만 퇴원하고 다시 회사에 출근할 때까지 병원을 찾지 않은 친구들과 오히려 약을 올리고 술 먹자고 유혹하는 친구들은 가까이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